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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의 47일을 되새기며 돌아보는 남한산성 성곽길

by 마미의 세상

"으으윾"

S자를 그리며 산성으로 오르는 길의 경사가 만만치가 않다. 남편의 거친(?) 운전 덕분에 마치 놀이기구를 타듯 심장이 쫄깃거리더니 어지럽기까지 하다. 멋진 풍광을 즐기기는커녕 내내 두 다리에 힘주고 두 손은 손잡이를 잡고 있어야만 했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광주 시내와 순환로의 분위기는 남산 순환로나 북악 스카이웨이 못지않다. 서울 서쪽 끝에 사느라 남한산성은 처음인데 무엇보다 걷지 않고 차를 타고 오를 수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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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올 때부터 등산화 신기를 거부하는 내게 잔소리를 하던 남편은 주차장에 내려서는 그저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다. 이궁~ 언제 눈이 왔담! 그저 평탄한 산성길이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밤새 내린 눈은 그새 군데군데 빙판길을 만들어 놓았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지만 마른 나뭇가지 위를 하얗게 만든 풍경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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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왕 때 토성으로 축성되었던 남한산성은 광해군 때 석성으로 개축되었다가 이괄의 난을 겪으며 인조는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 거대한 용 한 마리가 휘감듯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성곽길 옆으로 멋들어지게 서있는 노송이 성곽길의 품위를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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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때 제주목사 등을 지낸 이괄은 인조반정 때 인조를 왕으로 즉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공신들 간의 논공행상 과정에서 별다른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북쪽 변방인 평안도로 가라는 인조의 명을 받게 된다. 이는 좌천이라기보다는 후금과 명나라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믿을 만한 장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괄을 견제하는 세력들에게 역모를 꽤 하고 있다는 누명까지 받자 이괄은 난을 일으키게 되고 20여 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였으나 3일 만에 끝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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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이후 수도 방위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국왕의 호위를 위해 어영청이 확대 설치되나 상대적으로 북방의 방어가 소홀해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후금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군대의 기강이 엄격한 정예부대였던 어영청은 조선 말기로 오면서 군기가 풀어져 형편없는 오합지졸이 되어버렸다. 이에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영 비영'이라는 말이 나왔고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지금도 '어영부영'이라 한다.


병자호란 당시 한양도성을 버리고 자신이 개축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된 인조는 지화문(남문)으로 들어와 47일간의 항전을 하다가 청 태종 앞에 나아가 세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고 소현세자는 볼모로 끌려가야 했다. 가슴 아픈 모습을 모두 보았을 느티나무는 지금도 지지대에 몸을 의지한 채 꿋꿋하게 성문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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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화문과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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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개봉했던 영화 '남한산성' 촬영 시 12월에 급히 피신하느라 옷가지와 이불조차 제대로 챙길 수 없었던 왕가를 재현하고자 장면마다 하얀 입김이 나도록 촬영했다는 에피소드는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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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우울해 있는 마음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잔뜩 말라버린 채 햇살을 받고 있는 단풍잎이 손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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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DSC4791.jpg 손가락만 하게 서있는 롯데타워 주위로 옹기종기 들어찬 서울의 아파트 숲


수어장대는 이시백 장군이 병자호란 때 총지휘를 했던 곳이다. 단층이었던 서장대를 영조가 2층으로 증축하여 수어장대(지키고 막는다)라 하고 지금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췄다. 병자년에 겪었던 아픔과 북벌을 이루지 못한 효종의 원한을 절대로 잊지 말자는 뜻을 담은 '무망루'라는 편액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른편에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다. 숙종 철종 등 조선의 왕들은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올랐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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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망루

'청량당'이란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 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이 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 씨도 한강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이 회는 죽을 때 자신이 죄가 없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아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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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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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면서 내린 눈이 녹아 똑똑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봄을 연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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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DSC4837.jpg 송림이 있어 더욱 빛이 나는 성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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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대문 중 가장 규모가 작은 서문은 행궁의 우측에 있다 하여 '우익 문'이라고도 한다. 인조 15년 1월 30일

왕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하여 남한산성을 나간 문이다. 삼전도는 청나라 본진이 집결했던 나루터로 지금은 멀리 롯데 타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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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보수하면서 '완전한 승리'라는 뜻으로 전승문이라 칭한 북문은 병자호란 때 산성 방어의 총책임자인 김류가 군사 300여 명을 이끌고 청군을 공격하려고 나갔으나 청나라군에게 몰살당하고 만다.


_DSC4895.jpg 역설적으로 전승문이라 칭했던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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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서늘하다 하여 청량산이라 불리는 이곳이 소나무 숲으로 울창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곳에 주민들이 뜻을 모아 소나무를 옮겨 심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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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에서 내려와 만나게 되는 음식점들은 모두 한옥으로 지어져 있어 마치 한옥마을 같다.


_DSC4913.jpg 군사들이 훈련을 하기 위하여 건립한 연무관


성을 지을 때는 불이 나면 방화수로 쓰고, 전쟁 때는 식수로 또 임금을 만나러 올 때는 몸과 마음을 씻으라는 뜻으로 연못을 만들었다. 지수당 정자를 중심으로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지수당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되어 있어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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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DSC4944.jpg 지수당

성의 남동쪽에 있는 동문은 좌익문이라고도 한다. 차가 다니는 길가에 있는 동문은 계단을 쌓고 그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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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다음의 두 가지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2014년 6월 25일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첫째,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며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유사시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다.

둘째,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 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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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흥사 동종은 현재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 종은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 시 종 울림이 좋게 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하였다. 동종은 조선시대 산성 내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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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행궁으로 왕이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던 곳이다. 산성 밖으로 한강과 경안천이 있어 해자 역할을 하고 주례에 입각하여 삼문 삼조(왕궁 전체를 3개의 독립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구역을 울타리로 둘러싸고 문을 두어 연결)와 전조 후침(앞에는 조정, 뒤에는 침실) 전조 후시(앞에는 조정, 뒤에는 시장)의 원칙으로 지어진 데다 종묘와 사직까지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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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DSC4962.jpg 임금이 걷던 어로는 가운데이고 양옆으로 문관과 무관이 출입하였다.


_DSC4963.jpg 신하가 머무는 공간

행궁지 복원 시 한 점당 20여 킬로 그램 나 되는 초대형 기와(보통 4 킬로그램)가 350여 장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문무왕 12년에 축조한 주장성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무게를 건물이 어떻게 지탱해 냈을지가 의문이다. 발굴된 기와는 현재 토지 박물관(분당)에 보관 중이다.


_DSC4965.jpg 대형 기와가 출토된 곳


좌승당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_DSC4967.jpg 내행전의 북쪽에는 좌승당(앉아서 승리를 도모하자)이, 행궁 밖에는 '창을 베개 삼는다'라는 침과정이 있다.


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해와 달 그리고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와 함께 양 옆으로 온돌방과 마루 방이 있다.


_DSC4968.jpg 내행전 대청에 교의(임금이 앉는 의자) 뒤에 일월오봉도가 있다


'나라의 견고함은 산이 높고 낮음이 아니라 군주 스스로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의 재덕당은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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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덕당


이위정은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정조가 행차 시 자주 이용하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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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행궁의 상실과 함께 방치 되다가 이위정기의 탁본이 전해져 이를 토대로 2020년 다시 제작한 이위정기가 정자에 걸려있다.


남한산성 축성 당시에는 없었으나 산성 내에 행궁을 건립하면서 숙종 37년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좌전이다. 왕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을 배치하였다.


_DSC4985.jpg 유사시 종묘의 신주를 옮겨 봉안하기 위하여 만든 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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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위에 11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잡상(어처구니)'이다. 잡스러운 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궁궐 지붕에만 있다.

너무 뜻밖인 상황에 기가 막히다는 뜻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시골집만 짓던 기와장이가 대궐에 와서 잡상을 올리지 않아 생긴 말이다.


_DSC4991.jpg 외행전


주말이나 가을 단풍이 예뻤을 때는 인증숏조차 찍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는 산성길을 호젓하게 다녀왔다. 굴욕의 역사지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얼른 새해가 되어 봄과 가을의 모습도 보고 싶다.


_DSC4996.jpg 한남루의 정면과 후면 기둥인 주련에는 시구를 연결하여 걸어 당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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