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낯설기만 한 할머니와 언니 오빠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그중 할머니는 특히 아들 선호 사상이 강한 분이라 아들 중에서도 큰 오빠와 둘째 오빠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었다. 엄마 아빠와 살 때는 동생을 조금 더 귀여워하실 뿐 그렇게 큰 차별을 받아본 적이 없던 나는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 속에 아주 소심한 아이로 자랐다.
친가 외가를 합쳐 유일하게 성공한 집이었던 우리 집은 고향에서 상경한 사람들의 서울 거주지가 되어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식사를 할 때면 먼저 남자들이 먹고 나서야 여자들이 먹을 수 있었다. 맛있는 알맹이는 거의 남자들이 먹고 여자들은 그저 건더기 빠진 국물뿐이었다. 그렇게 못 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할머니는 왜 그렇게 음식을 차려주셨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요즘도 할머니 제삿날이면 큰 오빠는 할머니를 잊지 못할 분으로 이런저런 일을 떠올리지만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그렇게 따뜻하지만은 않다.
초등학교 첫 소풍 때 보호자로 온 것은 엄마가 아닌 큰 언니였다. 잔뜩 기대했던 것과 달리 언니의 핸드백에는 밤과자가 들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김밥을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우리 자매는 땡볕 아래 빡빡한 밤과자를 먹어야 했다.
그다음 소풍 때는 “저 내일 소풍 가요.”라고 할머니에게 미리 말씀을 드렸건만 할머니는 늦은 밤이 되어도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으셨다. 다음날 아침 나는 대성통곡을 했고 어찌어찌 급히 만들어 낸 도시락을 들고 눈물 젖은 눈으로 소풍을 갔다.
귀한 둘째 오빠를 위해서는 늘 소시지 반찬을 준비해 따로 밥상을 차려 주시던 할머니는 내 소풍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키우던 손주들에게 별 효도도 받지 못한 체 돌아가셨다. 아마 하늘나라에서도 귀한 손주만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게다.
주말이면 엄마 아빠가 계신 안양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103번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야 도착하는 안양. 그곳에서 또다시 버스를 탔다가 내리면 황금들판과 포도밭이 나왔다. 출렁이는 황금물결 사이로 한참을 걸어가야 했으나 나를 반기듯 날아다니는 메뚜기와 함께 껑충껑충 걷다 보면 금세 집이었다.
엄마는 더운데 고생하며 돌아온 내게 기다란 막대 아이스크림을 한 손 가득 사주셨다.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네모난 아이스박스를 들고 외쳐대는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아이스케키! 아이스케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갑자기 '영양실조'라는 문구가 적힌 성적표를 엄마에게 내밀었다가 그 여름방학 내내 아니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일일일닭을 했던 나는 그 후 지금처럼 통통한 몸매를 가지게 되었다
나에게는 두 딸이 있다. 그 서러움을 받으며 자랐건만 내가 임신해서 원했던 것은 딸이 아닌 아들이었다. 아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남편이 원했기 때문이다. 둘째 때는 임신한 것을 안 후 급히 아들 낳는 한약까지도 먹었으나 또 딸이었다. 셋째까지도 생각해 보았으나 내 주변에 그렇게 어렵게 낳은 아들들이 속만 썩이는 것을 보고는 애당초 포기했다.
두 딸만 있는 나는 귀여운 사위가 들어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