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희!

by 마미의 세상

내게는 오랜 친구 희가 있었다.


그녀는 중학교 때부터 알게 된 친구다. 엄마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 손에 큰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했다. 희는 소심한 내게 손을 내밀어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게 도와주고, 그 당시 학생은 들어갈 수 없는 포머스트라는 분식점에도 데려가 주고, 그녀의 집 골방에 데려가 몰래 성인 잡지도 보여줬다. 그런데 나는 그 친구가 고맙다기보다는 조금 버거웠다. 과감하기 그지없는 그녀를 따라가기에 내가 너무 소심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고등학교도 나를 따라 같은 상업학교로 왔다. 워낙 소심했던 나는 교련 시간에 인원 보고도 제대로 못해 쩔쩔매는 통에 기율부로 빠졌지만 그녀는 연대장까지 되어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청 역 근처 은행에 다니던 나와 서울역 근처 대기업에 다니던 그녀는 사회에 나와서도 지하철 한 정거장 타고 건너가 점심을 같이 먹곤 했다. 우리 나이 스물둘 되던 봄 그녀는 사업을 하는 어떤 남자와 결혼을 해서는 홀연히 내 곁을 떠났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늘 부담스럽게만 여겨졌던 그 친구의 빈자리는 의외로 컸다.


한 달 정도 방황한 끝에 나는 야간 대학에 가기로 하였다. 이미 취직까지 한 내가 대학에 간다고 하자 친정엄마는 빨리 시집이나 가면 될걸 허튼짓한다며 만류하였다. 엄마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입시 준비에 매진했다. 오랜만에 고전도 배우고, 한국사 세계사도 배우고, 생물까지 배웠던 배움의 시간들은 정말 꿈과 같았다. 5시 30분이면 칼같이 퇴근해서는 서울역 근처의 입시학원에서 밤늦도록 공부하고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며 육 개월 정도의 시간을 정말 미친 듯이 불태웠다.


그리고 대학 시험 보러 가던 날 아침, 친정 엄마는 시험 잘 보고 오라고 하기는커녕 일어나 보지도 않았다. 캄캄한 새벽 시험장으로 향하는 나는 서운한 마음에 눈물까지 났으나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았다.


1급 부기를 땄고 부기 경시대회에도 나갔던 경험이 있던 나는 회계사가 되어 멋지게 은행을 탈출하고 싶었다. 직장에서 가까운 D대학의 경영학과에 지원하여 무난히 입학하였다. 그리고 일과 학업과 연애까지 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이 지났다.


결혼 후에도 희는 가끔 은행에 찾아와 우리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몇 번이나 사업이 망하고 다시 일어서는 그녀의 시댁은 내게는 너무나 이상하고 먼 이웃나라 같았다. 그녀는 시장 아줌마처럼 옷을 입고 은행에 오질 않나 아줌마처럼 걸쭉하게 말하는 바람에 이질감까지 느껴 차츰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다.


인연이란 것은 참으로 질겼다. 남편의 회사는 어쩌다 그녀의 시댁이 관리하는 건물에 입주를 했고 남편 회사와 그녀의 시댁은 법정 투쟁까지 벌이게 되었다. 남편은 내 앞에서 늘 그녀 시댁을 욕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부축을 받고 만취해서 돌아오는 남편을 보고 나는 아연실색해서는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쌩하니 돌아섰다. 우연히 빌딩 로비에서 만나 같이 술 한 잔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나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 기분이 나빴다.


그렇게 찜찜한 사이로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녀는 은행에 찾아왔다. 내가 임신해서 입덧이 심하던 날 생선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생선을 손으로 발라주던 그녀는 늘 언니처럼 나를 챙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췌한 모습으로 찾아와서는 시댁이 부도가 났고 오랜만에 낳은 아들은 아직 한글도 못 떼었으니 얼마간 학원비를 도와줄 수 없냐는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내가 직장에서 자금과의 책임자가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어느 날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암에 걸려 직장 근처 원자력 병원에 입원하였단다. 너무 놀랐고 미안한 마음에 정말 꼭 다녀오리라 마음을 먹었으나 거의 매일 늦게까지 야근하랴 집에 가서 아이들 챙기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에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그녀는 퇴원해 버렸고 찾아갈 방도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 후 꿈속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시커먼 형체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심한 두려움에 떨다가 직감적으로 “희가 죽었구나.”라고 느꼈다. 나를 얼마나 원망하며 저 세상으로 갔을까? 내가 얼마나 무심했던지 그때까지 나는 그녀의 최근 전화번호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둘도 없는 절친 하나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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