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은행 서울지점은 전 직원이라고 해봐야 칠팔십 명이 고작이고 그것도 거의 여직원이다. 물론 다른 시중 은행에 들어간 친구들도 고만고만한 인원으로 구성된 은행 지점에서 일했지만 남녀 구성 비율은 우리와 달리 거의 반반 정도였다. 요즘과 달리 그때는 여고 남고로 나뉘어 친오빠 외의 남자와는 이야기도 할 수가 없던 때다. 그런데 동기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이성과 만나게 된 것이다. 꼭 연애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성을 대하고 툭하면 같이 야유회를 간다거나 퇴근 후 디스코텍에도 다녀온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친구들은 한껏 들떠 있었으나 나는 그저 부러운 눈으로 봐야만 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 당시 직장의 막내인 우리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선배들의 책상을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누구도 한 마디의 불평불만을 하기는커녕 그저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하긴 선배들은 결혼해서 임신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각서까지 썼다고 한다. 은행 분위기는 마치 기숙사와 같았다. 엄격하게 선후배에 대한 서열이 있고 출신 학교별로 꽁꽁 뭉치는 분위기는 나를 숨 막히게 하고 주눅이 들게 하였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두툼한 월급봉투뿐이었다.
이런 직장 분위기는 소심한 나를 점점 독한 여자로 만들어 갔다. 그저 인정받기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렸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직장을 탈출하기 위하여 야간 대학에도 들어가고, 승진시험도 한 번에 모든 과목을 통과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과연 그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몇 명 안 되는 남자 직원 역시 출신 학교별로 뭉치고 대립하였다. 이런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아는 일본 스텝들은 한국 시니어들을 내쫓을 때 바로 그 아래 직원들을 부추겼다. 그들은 본인들도 몇 년 후 똑같이 당할 것을 모르는지 선배들이 나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정년까지 가는 남자 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내가 신입 행원 교육을 시킨 남자 직원이 곧 나의 상사로 올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용단을 내려 22년이라는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아쉬웠는지 퇴직을 하고 거의 1년이 넘도록 매일 밤 꿈속에서 직장 동료들과 만났다. 내가 빵집을 시작하고 나서야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비록 애증의 세월이었어도 20여 년의 직장 생활로 나의 경제 사정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넉넉하게 노후 준비까지 할 수 있었다.
요즘 만나는 작가들이나 연극인 등 유능한 재주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다지 수입이 많지 않은 사람들을 본다. 나처럼 별 볼일 없던 사람이 이 만한 부를 축적하게 해 준 점에서는 내 직장이 고맙기 그지없다. 다만 그 파릇파릇했던 시간을 좀 더 행복하게 일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