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태어나던 날 그렇게 춥고 눈이 많이 왔다더니 결혼식 날도 하루 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제주도행 비행기는 연착에 연착을 거듭하다가 겨우 출발해 우리가 제주도 호텔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다음날이었다. 이성에 눈을 뜨면서부터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첫날밤을 꿈꾸곤 했다. 가슴 떨리는 대화에 뜨거운 키스까지.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애틋한 첫날밤은커녕 절대로 돌이켜보고 싶지 않은 악몽의 밤이 되었다.
함이 들어오던 날 홍제동 산꼭대기 시민 아파트 3개 동은 난리통이었다. 그곳에 산 지 10 년이 다 되었어도 그렇게 요란하게 함이 들어온 집은 없었는데 그날 함잡이들은 걸쭉하게 놀며 아파트 주민들에게 내 결혼을 알렸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우리의 결혼을 알렸건만 정작 결혼식 날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생각도 나고 홀로 남겨두고 올 친정어머니 걱정도 앞섰다.
게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신부 쪽 하객을 싫은 단체 버스는 시간이 임박해도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홀로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고 대기실 밖은 시댁 친지들의 웃음꽃 피는 소리에 시끌벅적했다. 베이지색 양복을 입어 훤칠해진 남편을 보고 다들 예쁘다고 칭찬이 자자했지만 신부 대기실 안의 내게는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에 겨우 맞춰 도착한 우리 쪽 친지들과는 사진 한 장 찍을 시간도 없었다.
우리의 첫 보금자리는 연립주택 단칸방이었다. 결혼 직전 네 시누이들을 데리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이 기쁜지도 몰랐다. 그렇게 나는 뭘 몰라도 정말 몰랐다. 육백만 원 전세라더니 삼백만 원은 계를 미리 타서 온 것이라 그것마저 갚아야 했다. 시누이들은 독산동 아파트 전세에 살았고 우리는 그녀들을 데리고 있지 않는 대신 단칸방에 살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아마 같이 살았다면 시누이들과 지금처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난방을 연탄 보일라로 했기에 통 3개에 3장씩 연탄을 갈아 넣어야 했다. 연로하신 할머니 대신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생전 연탄을 갈아 넣어 본 적이 없던 나는 연탄 갈 때마다 심하게 쿨럭거려야 했다. 그뿐이랴 연세가 많이 드신 주인집 할머니는 내가 아침에 머리를 말리느라 드라이를 잠깐 쓸 때도 큰기침을 하시며 "그 드라이가 전기세가 많이 나올 텐데..."라고 말하시는 바람에 세탁기는 들여놓을 생각도 못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남편이 아침 6시 출근하고 나면 생전 양말 하나 빨지 않던 나는 손빨래를 해야 했다. 덕분에 출근해서 전표 하나 작성하려 해도 손에 힘이 달려 손이 덜덜 떨리곤 했다. 어디 그뿐이랴 퇴근시간이 빠른 나는 남편이 올 때까지 천천히 저녁 준비를 해도 될 만큼 시간이 남았다. 그때 남편은 내가 일과 살림을 병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모두 남편의 칭찬 덕분이다. 라면 하나 끓여보지 않은 내가 살림 장만하러 갔을 때 시어머니가 선택해 준 압력 밥솥은 거의 스므명 정도의 밥을 할 수 있는 커다란 밥솥이었다. 밥 한 번 해보지 않은 내가 그것도 처음 써보는 압력 밥솥에 바닥에 겨우 깔릴 정도의 쌀에 밥물을 맞출 수는 없었다. 하루는 질고 하루는 타고..... 반찬은 또 맛이 있었을까? 은행 셔터만 내리면 요리책을 펴놓고 공부를 했건만 어떤 때는 짜고 어떤 때는 맹맛이고. 그때 나의 마술 가루는 설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먹지 못할 느끼한 맛이었을 텐데 울 남자는 무엇을 해줘도 맛있단다. 그 칭찬을 받기 위해 요리를 거듭하다 보니 이제는 남들 하는 정도는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칸방에 살던 우리는 꽤나 눈치도 없었다. 마치 우리 집인양 매주 주말이면 거실에 남편과 내 친지들을 불러 두어 달 가까이 집들이를 하였다. 물론 요리사를 부른 적도 없고 엄마의 도움을 조금 받기는 했으나 내 손으로 치러냈다. 그러니 요즘 십여 명 정도의 손님을 부르는 것은 일도 아니다. 내가 가장 즐기는 일 중 하나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지인과 나눠먹는 것이다.
올해도 알타리 30 단에 100 킬로그램의 절임 배추를 시켜 김장을 했는데 친정과 시댁으로 나르다 보니 어느새 2대나 되는 김치 냉장고가 비어 가고 있다. 아직 겨울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담가 먹지 뭐. 냉동고에 새우젓과 고춧가루가 가득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