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꿈같은 대학 생활이란 없었다

by 마미의 세상

이제 와서 대학 4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보면 매일매일 시간에 쫓기고 리포트 내기 바빴고 피곤했던 기억밖에 없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 4년이라는 시간이 있었기에 최종 학력 란에 '대졸'이라고 쓸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빵집을 운영할 때 어떤 손님이 와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이 나를 마구 무시하는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컥하여 "저도 대학 나왔어요" 하고 언성을 높이자 "그게 무슨 대학이에요"하고는 빈정거리는 것이다. 그녀는 도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온 것일까?


주간 학생들과 같은 커리큘럼으로 똑같이 공부했는데 그렇게 무시당할 일이었는지. 다만 4학년 때 연애하느라 공부를 좀 게을리한 것 외에는 흉 잡힐 게 무엇일까? 그런 그녀는 어느 대학을 나왔기에 내게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그 당시 내 수능 성적은 우리 큰 올케가 나온 이화여대 사회사업과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성적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대에 들어갔다면 "나 이대 나온 여자야"하고 평생 외치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학교 수업은 6시에 시작했다. 은행에서 칼퇴를 한다 해도 유니폼 갈아 입고 학교 강의실까지 제시간에 도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놈의 목멱산 비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강의실에 도착하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곤 했다. 그때는 또 왜 그렇게 데모는 해댔는지. 그냥 오르기도 힘든데 툭하면 체류탄 가스를 쏘아대는 바람에 쿨럭이며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밖에서는 데모하고 우리는 딴 세상 사람인 듯 공부하고...


회계사가 되겠다고 대학에 갔는데 경영회계 계열에서 분리되는 2학년 때 나는 갑자기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점점 나의 꿈은 멀어져 갔다. 덕분에 공부 하나도 안 하고 거저 학점을 땄던 회계학도 있었으나 대학 입학시험 볼 때 1,2,3,4로 찍고 나온 수학 실력으로 재무관리 과목을 들을 때는 그저 죽을 맛이었다. 물론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과목은 불교학 개론이다. 도대체 아무리 강의를 열심히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쩌다 불자가 되어 가끔 절을 찾는 지금도 그 심오한 진리까지는 잘 모르겠다.


직장을 탈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교직과목을 이수해 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직 필수 과목 중 실습이 필수였기에 장기휴가가 어려운 나로서는 선생이 되는 길도 포기해야 했다. 나의 어려서부터의 꿈인 선생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나는 용기가 없어 그저 은행원으로 안주하고 말았다.


그해 내 나이 꽃다운 스물셋, 제대로 들어갔으면 벌써 4학년이었겠지만 그제야 1학년 새내기가 되었다. 좀 통통하기는 해도 한참 예쁘지 않았을까? 100여 명의 시커먼 남자들 속에 여학생은 고작 10 명 안팎이었다. 뜨거운 시선도 몇 번은 받았으나 캠퍼스 커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많은 기대 속에 참석했던 축제. 가슴 두근거리며 하루 휴가를 내고 낮에 가본 학교 교정은 별천지였다. 잔디밭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학생들이나 축제에 참여해 즐기고 있는 모습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너무나 달랐다. 나는 그저 낯선 이방인이었다.


학교 위치가 장충동이어서 단체 회식만 가면 족발집이었다. "때 낀 족발이 더 맛있어"하며 게걸스럽게 먹는 남자들을 보며 그저 빈 젓가락질을 해야 했다. 직장 바로 아래 두산빌딩 지하에서 먹던 족발은 그렇게 두꺼운 껍질도 없고 그저 소시지 같았건만 학교 근처의 족발은 쑹덩쑹덩 썰어놓은 돼지 발 모습 그대로인 데다 두꺼운 껍질까지 있어 그저 징그럽기만 했다. 지금이야 그것이 더 맛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땐 그 맛을 몰랐다. 그래도 체육대회 때 막걸리 한 잔과 쟁반 가득 배달되어 온 두부를 먹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신 인사관리 교수님과 함께 간 설악산 MT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았다. 뽀글 머리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처음으로 올랐던 울산바위, 1박 2일이라는 시간으로 그저 얼굴만 알던 같은 과 학생들과 한층 친해질 수 있었다. 벌써 속 알 머리 없던 학생과 앳된 교수님이 함께 찍은 단체사진을 보고 "도대체 누가 교수인 거야?" 하고 놀려대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저녁 식사 파티 후 즉석 댄스를 권하시던 멋진 교수님은 그 후 본교인 서강대학교로 가셨다는데 또 얼마나 많이 변하셨을까?


나의 고질병인 위장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침은 거르기 일쑤요, 은행 업무상 필요한 영어와 일어를 배우기 위하여 점심시간에는 은행 주변에 있는 어학 학원에 다니느라 대충 김밥으로 때웠다. 저녁 또한 먹을 시간이 없었으니 11시 넘어 집에 돌아오면 종일 제대로 밥을 챙겨 먹지 못했을 딸을 위하여 밥상을 차려주는 엄마의 정성을 뿌리칠 수 없어 그 늦은 밤 허기진 배를 채우고 곧바로 잠이 들었으니 위가 성할 리가 없었다.


아마 방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4년이라는 시간. 그 후로 이력서를 새로 쓸 일도 없었고 4년간의 배움은 내 인생에 그다지 쓸모도 없었고 단지 내 만족이었을 뿐이다. 다만 우리 딸들은 늘 엄마처럼 열심히 살 수는 없을 거라며 "우리 엄마는 정말 대단해"라고 응원해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학 졸업식에 시댁 식구들까지 와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친정 식구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들까지 모두의 축하를 받으며 그렇게 4년 간의 고된 생활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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