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역 7번 출구, 경희궁, 서울 역사박물관
광화문 광장에서 서대문 쪽으로 걷다 보면 잔디밭에 뜬금없이 문인석과 장명등이 보이는가 하면 석양과 석마 그리고 옛 추억이 떠오르는 전차도 전시되어 있다. 바로 서울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서울 역사박물관'이다. 전에 이곳에 서울 고등학교가 있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는데 이곳이 경희궁터였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역동적인 역사를 돌이켜보게 하는 서울역사박물관
박물관은 4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번째 방은 조선시대, 두 번 째는 대한제국 시대, 세 번째는 일제 강점기 그리고 네 번 째는 고도 성장기를 겪는 서울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생성된 계획도시 한양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새롭게 왕도로 삼은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한양)이다.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과 낙산을 좌 청룡 우 백호로 삼고 궁궐과 종묘를 지었다. 혜정교에서 동대문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핵심 관청(이조, 호조, 예조, 형조, 공조, 병조)이 들어서며 육조거리가 완성되자 10만 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계획도시가 완성되어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8세기 한양은 역동적으로 변하던 도시였다. 상업이 발달하며 도시 문화도 찬란하게 꽃피었다.
주로 왕족과 권력층이 거주하던 서촌 북촌과 달리 점차 돈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하면서 중인들의 문화가 꽃피기 시작해 전문직들은 중촌에, 고고한 선비들은 남촌에 모여 살았다.
서양문물이 들어오며 거리풍경은 눈에 띄게 달라졌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은 남촌에 모여 살았다. 그리고 서울(경성)은 항일 민족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해방으로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던 우리에게 또다시 찾아온 한국 전쟁. 고난은 계속되었다.
'돌격 건설'이라는 말이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기반 시설을 일구고 여의도의 작은 섬을 개발하여 금융가로 만드는가 하면 어머니들의 교육열을 자극하여 서울고등학교 등 명문 학교를 강남으로 이전하자 강남은 서울의 새로운 부촌으로 폭풍 성장하게 되었다.
해설을 들으며 돌아본 시간은 겨우 한 시간 정도였으나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근현대사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아프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이만큼 성장한 우리나라가 그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광해군이 지은 경희궁은 왜 이토록 훼손되어야만 했을까?
조선에는 법궁이었던 경복궁 이외에도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있다. 그런데 유독 경희궁은 왜 이렇게 단출(?)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멋진 산수화의 한 장면처럼 백악산과 화려한 꽃 사이로 보이는 우리의 궁궐은 섬세하고 기품이 있다. 점심 식사 후 커피 한 잔 들고 산책하는 사람들로 궁은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입장료도 없는 데다 숨 막히는 사무실에서 근무하다 이곳 한 바퀴 돌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질 게다.
기쁨이 넘치고 빛나는 궁이란 예쁜 이름을 가진 경희궁은 광해군이 재위 중 완성한 궁궐이다. 그러나 1868년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사업을 하며 숭정전 등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전각을 뜯어냈고, 정문인 흥화문은 일제강점기 때 박문사에 팔려갔다가 호텔신라 정문으로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최근 경희궁 복원사업으로 흥화문이라도 제자리를 찾으려 했지만 원래의 자리에는 구세군 회관이 있어 부득이하게 현재의 자리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일제는 왕의 침전에 방공호를 만드는가 하면 숭정전을 학교로 이용했고 그 앞에 일본인 학교를 세웠다. 그 학교는 해방 후 서울고등학교로 사용되다가 강남으로 이전한 후에야 경희궁 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학교로 사용되던 숭정전은 동국대학교의 정각원이 되었다.
정통성 때문에 힘들었던 광해군이 경희궁을 지은 것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는 광해군은 후궁인 공빈김 씨의 둘째 아들이다. 모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외롭게 자라다가 임진왜란이 터졌다. 피난을 가야 했던 선조는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전쟁 중에 분조(임시 정부)를 이끌게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백성들이 선조보다 광해군을 신임하는 것을 보고는 선조는 본인이 세자로 정했던 광해군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그러나 선조의 뒤를 잇기에 영창대군은 너무 어렸기에 광해군이 제15대 임금으로 즉위를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 정통성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1616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흐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광해군은 그 집을 몰수하여 다소 무리하게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중 분조를 이끌다 보니 백성의 피폐한 살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물 대신 토지의 소유에 따라 세금을 내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하는가 하면 당시 지는 해였던 명의 파병 요구를 듣지 않았다. 이는 의를 중시하는 가진 자들이었던 조선의 신하들을 반발하게 하였다.
게다가 광해군은 어미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는가 하면 무리하게 벌인 경희궁 공사로 반감을 증폭시키고 말았다.
결국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인조는 빼앗겼던 아버지 집을 멋진 궁궐로 되찾고 그는 왕이 되었다.
광해군 옆에는 왜 매관매직이나 일삼던 김개시 밖에 없었을까? 선조가 그를 좀 더 인정해 주고 훌륭한 신하들이 따라주었다면 그가 그렇게 파탄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텐데....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이 나서 모두 사라졌지만 창덕궁과 경희궁은 수백 년 간 조선의 정궁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희궁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 세 임금의 즉위식이 열렸고, 영조가 가장 오래 머물렀으며 숙종과 헌종의 가례가 이곳 경희궁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경희궁 바로 옆에는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생활사 전시관, 극장 등 5060 세대들이 기억하는 옛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주말이면 벚꽃도 만개할 것 같다. 번잡하지 않은 시내로의 지하철 여행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