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골목길 걸어볼까요?

한성대 입구 6번 출구, 성북 03, 성북 02

by 마미의 세상

덥지도 춥지도 않은 데다 꽃까지 만발한 요즘이 도보여행하기 딱 좋을 때다. 오랜만에 공연을 보기 위해 찾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는 팬플룻 공연까지 열리고 있다. 애간장을 끓게 하는 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낙산공원 가는 길'이라는 표지를 보고는 불현듯 한양도성에 오르고 싶었다. 이화마을. 벽화가 몇 개 없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보니 반갑다.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무렵 성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은 외국의 크고 웅장한 건물보다는 작고 섬세한 한옥이나 도성처럼 구불구불하게 지어진 우리의 건축물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게다가 100여 미터만 오르면 남산타워 아래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 건물과 주택 등 서울의 정경이 훤히 보인다.




성곽에서 바라보는 성북동은 전에 성북천이 흘렀다는 도로를 경계로 아직도 달동네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북정마을과 올려다보기도 힘든 담장 위에 지은 호화스러운 저택들이 마주하고 있다.


한성대 입구 6번 출구에서 성북 03번 타고 북정마을로!

한성대 입구에서 성북 03 버스를 타면 서울 성곽이나 와룡공원 그리고 북정마을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성곽이 마을 전체를 담장처럼 둘러싸고,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은 바로 오육십 년 전의 서울의 모습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걸으며 절로 향수에 젖어든다.




오래된 슬래트 지붕은 알록달록하게 칠해졌다. 좁고 가파른 길로 이어지는 마을은 낙산의 비탈에 지어서인지 이웃과 딱 붙은 채 지붕은 도로와 비슷하게 납작 엎드려 있다. 철문은 녹이 슬어 열리지도 않을 것 같고 또 어떤 집은 사람이 살고 있지도 않은지 우체통에는 우편물만 가득 끼워져 있다.


한양도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다더니 아마도 재개발도 못하고 그 모양 그대로 남아있나 보다. 그리고 길고양이들은 어찌나 많던지 그곳에서 만난 사람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북정마을은 조선 영조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늘 암살의 위기를 느끼던 영조는 4 대문과 4 소문이 있음에도 혜화문 근처에 암문을 만들고 도성 수비를 담당했던 어영청 군대를 주둔시키며 숙정문과 혜화문을 지키는 군인가족들까지 살았다.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주로 메주를 담그고 포목을 잿물에 삶아 하얗게 표백시키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메주를 쑤다 보니 메주 끓는 소리가 북적북적하고 사람도 북적이다 보니 북적골이라 하다가 북정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빈털터리로 헤매다 무너진 성곽 아래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곳 또한 이곳 북정마을이다.


전쟁과 도시 개발로 둥지를 잃고 쫓기는 비둘기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고 김광섭 시인은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를 만들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님이 살았던 심우장

독립운동을 했던 33인 중 한 사람으로, 시인으로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만해 한용운 선생의 집이 마을 아래쪽에 있다. '심우장'이란 불교 설화에서 따온 말로 소는 불가에서 인간의 본래자리를 의미하며 소가 깨우침을 찾아가는 과정 즉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출한 한옥에는 서예가 오세창 선생이 쓴 심우장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한용운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도 있다.



죽는 날까지 독립될 날 만을 기다리며 "조선 땅덩어리가 이 지경인데 내 어찌 불 땐 따뜻한 방에서 살 수 있냐" 며 불을 지피지 않은 채 냉골에 사셨다고 한다. 님의 침묵을 비롯한 88수의 시를 쓰며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으나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에 생애를 마치셨다.


성북동에 살았던 예술가들

비록 전차머리까지 도보로 20분이나 걸어야 하지만 숲이 우거지고 경치가 아름다웠던 성북동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다. 서양화가 김환기의 수향산방을 비롯해 이태준이 평생 살고 싶어 지었던 수연산방도 있다.



요정문화의 산실이었던 대원각은 조계종 길상사로!

한성대 입구역에서 성북 02를 타면 바로 길상사에 갈 수 있다. 절이기는 하나 다른 절과 그 생김새가 좀 다르다. 게다가 오른쪽에 세워진 관세음보살 상은 마치 천주교의 마리아상을 연상하게 한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이었기에 더 애달픈 백석과 자야(김영안 보살)의 사랑

함흥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26세의 백석시인과 23세의 진향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기생 자야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자야는 양반집 딸로 태어났으나 갑자기 집이 몰락하는 바람에 기생이 되었으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기생이라는 신분 때문에 부모님의 반대로 둘은 끝내 결혼할 수가 없었다. 그 후 6.25 전쟁이 일어났고 백석은 부모님의 뜻대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자야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하며 남쪽에서 살았다.


백석은 월북하여 북한에서 6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수많은 시를 쓰며 시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자야는 평생 백석만을 가슴에 담고 살면서 백석문학회까지 운영하였다. 죽기 전 자야는 "1,000억 원이 넘는 길상사는 백석시인의 시 한 줄 보다 못하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백석을 애틋하게 사랑하였다고 한다.



김영안 보살과 법정스님의 만남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자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법정스님을 내내 쫓아다녔으나 법정스님은 계속 거절하였다. 1995 년에야 법정스님은 자기가 아닌 불교 조계종에 기부하라고 하셨다. 그로써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사찰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자야가 살던 집도 백석 문학상의 기금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마리아상을 닮은 관음보살상은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해 봉인한 것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손에는 버드나뭇가지와 정병을 들고 있다


길상사에는 그녀의 공덕비와 사당이 세워졌고 경내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그녀의 유언을 따라 유골이 뿌려졌다. 법정스님도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 여러 개의 요사채 중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 법정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 따라 찻잔과 옷 등 최소한의 물품만 남았고 바로 옆에는 무덤이 아닌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곳에 스님의 유골을 모셨다.


법정스님의 요사채와 유골을 모신 곳


김영안 보살의 사당

길상사 근처에는 부유한 사람들의 저택으로 보이는 높은 담을 가진 양옥주택들이 가득하다. 삭막한 담벼락을 보고 걷는 것보다는 비록 가파르기는 하나 북정마을의 좁은 골목을 오르내릴 때의 정취가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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