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성신여대역 4번 출구를 나와 숨이 살짝 차오를 때까지 언덕을 오르다 보면 돈암2동 주민센터가 보이고 바로 위에 흥천사가 있다. 흥천사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정왕후의 능인 정릉의 능침사찰이다. 절은 다가오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걸어 둔 오색 연등과 봄꽃으로 화려하다.
신덕왕후 그녀는 누구인가?
신덕왕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다. 태조는 이런저런 공을 많이 세웠으나 지방토호 출신이라 조선을 건국하려니 개성 권문세족의 배경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가 정략결혼의 상대로 택한 것은 고려 말 빵빵한 배후를 가졌던 강 씨다. 사냥을 하던 장수가 우물가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자 바가지에 물을 떠서는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급히 마시지 말라는 배려다.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신덕왕후다.
처가뿐만 아니라 전처소생의 아들들까지 이성계와 함께 새롭게 나라를 세우니 바로 조선이다. 당시 이방원 등을 낳은 한 씨(신의왕후)는 조선을 세우기 전에 죽었고 계비인 신덕왕후는 조선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에 같이 힘썼던 형 이방과도 있어 처음에는 왕권에 큰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비인 신덕왕후가 정도전과 합세하여 그녀의 둘째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방석과 정도전 그리고 화병을 얻은 신덕왕후도 죽게 된다.
정릉과 흥천사의 건립과 수난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빠져 있던 태조는 경복궁 지척에 신덕왕후와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만드니 정릉이다. 게다가 금빛으로 찬란한 170여 칸이나 되는 흥천사를 지었다. 태조는 흥천사에서 종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신덕왕후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했다. 그는 아버지 태조가 죽자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고 묘의 봉분도 완전히 깎아 민묘로 만드는가 하면 신덕왕후의 지위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광통교가 홍수로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이었던 병풍석과 난간석을 다리복구에 사용하고 그 밖의 목재나 석재들도 태평관을 짓는데 썼다고 한다. 그는 제대로 복수를 했고 그 미운 마음이 어찌나 컸던지 적서차별제라는 제도까지 만들었다.
태조와 신덕왕후가 조금만 미래를 내다봤더라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그토록 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껏 만든 새나라의 왕가에 그렇게 혹독한 피바람도 불지 않았으련만....
능침사찰이었던 흥천사는
능이 옮겨진 후에도 흥천사는 태조의 원찰로 남아있다가 연산군 때 유생들의 방화로 추정되는 큰 불로 사리각까지 전소되었다. 흥천사는 정조 때 신흥사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의 자리로 옮겨진 후 중창을 거듭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특히 고종 때는 신도들이 숙식하며 수행할 수 있는 '대방'과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채까지 건립하면서 창건 당시의 이름인 흥천사가 되었다.
42수 금동 천수관음보살좌상은 곧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며 흥천사라는 편액은 흥선 대원군의 필체라고 한다.
신덕왕후가 잠든 정릉
흥천사부터 걸어서 한 10분 정도 가면 세계문화유산인 신덕왕후의 정릉이다. 보통 왕릉에 가면 홍살문에서 능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으나 지형에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직각으로 꺾여있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만 당시의 것이고 나머지 석물들은 현종 때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민묘나 다름없던 정릉은 현종 10 년에 들어서야 겨우 제대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봄기운이 가득한 정릉 안 마당에는 아픈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어린 새싹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재실의 아궁이가 새까맣게 그을린 것으로 보아 실제로 관리인이 거주했던 것 같다. 다른 능과 비교했을 때 재실의 규모는 빠지지 않고 멋스러운 고목이 있어 운치가 있다. 그 옛날에는 이곳이 변두리였을지 몰라도 정릉천이 흐르는 주변은 한가하고 아름답다. 성냥갑 같은 네모 속에 갇혀 살다가 능이긴 해도 널찍한 공간에 나오니 상큼한 봄기운이 몸과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온다.
4월 19일이라 근처 4.19 민주묘역을 찾았다. 우이신설선을 타고 4.19 민주묘지역에 내리니 흰색과 검은색의 플래카드가 많이 걸려 있다. 또 기념행사를 치렀는지 부산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묘역 앞에 서자 가슴이 아려왔다. 죽은 이의 이름 옆에는 대학교와 고등학교 심지어는 초등학교 이름까지 쓰여있다. 희생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다. 그들은 누구처럼 정치와 권력에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그저 혼탁한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묘역 뒤쪽에 앉아 술을 마시며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이가 있다. 희생자와는 어떤 관계일까? 아마도 친구나 형제자매겠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은 정의를 위해 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유영봉안소에는 507위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있는데 거의 어린 학생들이다
권력 때문에 죽어야 했던 사람들과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우다 간 사람들을 보았다. 그 어린 생명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그나마 혼탁한 사회가 정화될 수 있었다. 그들의 희생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단체로부터 온 화환들이 보인다. 그저 형식적으로 보낸 것은 아니겠지? 특히 정치가들은 어린 학생들의 바람을 명심해서 잘, 정말 잘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드는 또 하나의 의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그렇게 욕하면서 방석 등을 죽이고 왕이 된 태종을 욕하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다. 아니 신덕왕후와 태조를 욕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