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독립문역
5월이면 늘 찾는 곳이 서대문의 안산자락길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은은한 아카시아 향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가지마다 빈틈없이 피어있는 아카시아 꽃을 보다 보면 초등학교 때 달큼한 꽃을 먹던 기억과 함께 가위바위보를 하며 아카시아 잎새 떨구기 놀이를 하던 추억까지 떠오른다.
이제는 유명세 때문에 유유자적하게 걸을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국립공원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집 강아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처럼 엄마 아빠와 함께 외출한 녀석은 우리 부부의 발 사이를 오가며 챙기느라 어지간히도 바쁘다.
여린 초록 잎이 나온 지 엊그제 같은데 제법 짙어진 나뭇잎 사이로 우리네 사는 도시가 퍼즐조각처럼 보인다. 이렇게 도심 한가운데에 산책하기 좋은 길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산림녹화와 목재 땔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심었다는 아카시아는 산을 황폐화시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눈총을 많이도 받았다지만 이 5월에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은 아카시아다.
어쩜 솜뭉치처럼 탐스런 꽃을 저렇게 많이도 피웠을까? 잠시 눈을 감고 발걸음을 멈춘 체 그 진한 향을 음미해 본다. 살아있음에 이곳에 서 있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바로 얼마 전에는 벚꽃 길을 걸으며 행복해했는데 이제는 아카시아 꽃이 데크에 가득하다. 봄은 그렇게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있다.
바로 아래 서대문 형무소가 있어서인지 자락길 곳곳에는 독립투사의 사진과 함께 약력등을 쓴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한복을 입은 소박한 그분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리다. 왜 우리나라는 그토록 힘이 없었을까? 그래도 끝까지 저항하며 굽히지 않았던 그분들이 있었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 향"
절로 흥얼거리던 노래 가사와 달리 내 기억 속의 찔레꽃은 흰색뿐이다. 아카시아 꽃에 질세라 찔레꽃도 한창이다. 어디 그뿐이랴 처음 꽃 이름을 알고 난 후 절대로 그 이름을 잊지 않는 꽃이 '아기똥 풀'이다. 저리도 귀여운 꽃에 아기똥이라니! 아마도 아기똥마저 예쁘게 보이는 부모의 마음으로 지었겠지? 큰 나무 아래에는 노란 아기똥풀이 지천이다.
'고은 초등학교' 팻말이 보이면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가 처음 신혼방을 꾸몄던 홍제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때 살았던 연립주택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저곳쯤이지 않을까 하며 손가락질해본다.
지금은 그렇게 시작하는 커플이 없겠지만 우리는 이곳의 연립주택 방 한 칸부터 시작했다. 젖은 머리카락 말리기 위해서 헤어 드라이기를 쓰려해도 눈치를 주던 주인 할머니는 아마 돌아가셨겠지? 그래도 우리 큰 딸 태몽도 꾸어주셨다. 할머니는 석유곤로에 밥을 지으셨기에 주방에서는 늘 석유 냄새가 났다. 연탄보일러에 연탄을 갈아 넣어야 했고 세탁기가 없어 남편이 출근한 후 손빨래를 하고 은행에 출근을 하면 전표 한 장 작성하려 해도 손이 덜덜 떨리곤 했다. 이제는 그런 기억마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래도 데이트 후 더 이상 헤어지지 않아도 되고 자다가 무심코 차버린 이불을 슬며시 덮어주는 남편이 있어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스물여섯 새댁은 어느새 환갑도 지난 중년 여인이 되었다.
참 열심히도 살았다.
서대문 구청 근처에서 잠시 자락길을 내려오면 안산방죽이 있다. 숲에서 만나는 작은 연못에는
올챙이와 도롱뇽이 산다고 한다. 개구쟁이 녀석들은 올챙이라도 건져 보려는지 연못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혹시나 하고 내려갔던 연희 숲 속 쉼터에는 어느새 튤립은 모두 져버리고 푸른 줄기만 남아있어 아쉽기 짝이 없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메타쉐콰이어 숲길이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나무 사이로 걷다 보면 청정한 공기가 가슴 가득 차오른다. 사람들은 각자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는 발바닥이 너무 아파 양말까지 벗어던지고는 그냥 대자로 누웠다가 어느새 코까지 골았는지 남편이 흔들어 깨운다.
정상 봉수대에 오르면 서울 도심의 풍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도 있고 경사가 심하지 않은 무장애 자락길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돌 수도 있다. 인왕산과 북한산 홍제동에 이어 연희동 신촌까지 도심 풍경을 보며 숲과 함께 하는 세 시간 남짓의 시간은 그야말로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