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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Jul 25. 2022

감라스탄에서 시작된 스웨덴!

스톡홀름 가는 길에 하룻밤 머물렀던 칼스타드. 어둠이 내려앉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다시 먼동이 터온다. 다시 언제 올지 모르는 낯선 도시를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호텔방을 나섰다.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는데도 벌겋게 물든 하늘에서는 오늘의 해가 뜨고 있었다.




칼스타드는 노르웨이에서 들렸던 전원도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전형적인 도심 풍경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아마 날씨 때문이었던 것 같다. 흙길이 아닌 아스팔트 길 양쪽에는 사오층높이의 건물이 빼곡하다.





스웨덴의 수도는  Stock(통나무)과 Holm(섬) 이 결합하여 스톡홀름이라 하는데, 도시 경계를 위하여 통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인지 통나무를 물에 띄워 그것이 닿는 곳에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륙에 붙어있는 반도와 13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져 '북쪽의 베네치아'라고도 한다.






스톡홀름 시청사

그중  왕의 섬에 스톡홀름 시청사가 있고 청사 앞은  멜라렌 호수다. 우뚝 솟은 종탑 아래  길고 네모난 창을 빼고는 산뜻한 붉은 벽돌로 지어진 청사는 다소 투박하기는 하나 아치형 기둥으로 한껏 멋을 냈다. 


40분에 한 번 씩 입장이 진행되는 시청 타워의 꼭대기에는 스웨덴을 상징하는 3개의 왕관이 있다. 


건축가 란나르 외스트 베리는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전과 산마르코 광장의 종탑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했다고 한다. 북유럽 건축 양식에다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까지 더해졌다. 종탑은 원래 105 미터로 설계되었다가 덴마크 코펜하겐의 시청사보다 1미터라도 높이기 위해 106 미터로 바꿨다고 한다. 


시청사 건너편


시청사 앞

담쟁이가 가득한 벽면에서 바라보는 멜라렌 호수는 더없이 푸르고 고요하다. 시청사는 가이드와 함께라야 입장이 가능한 데다 지정된 시간에만 들어갈 수 있기에 우리는 아담한 중정에서 잠시 기다리며 청사의 외부 정원을 즐겼다.

 


매년 12월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회가 열린다는 블루홀은 멜라렌 호수의 푸른빛에 감명을 받아 내부를 푸른색으로 칠하려다 붉은 벽돌의 고풍스러운 맛에  이름만 블루홀로 부르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시의회가 열리는 대회의실이다. 101명의 의원들이 회의하는 모습은 누구나 볼 수 있게 생중계되며 현장 참관도 가능하다. 천장은 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이다. 바이킹의 나라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창 무늬가 한옥을 연상시키게 한다

스톡홀름의 시의원들은 우리나라처럼 파워가 없고 청렴결백하다고 한다. 연봉이라고 해봐야 1년에 200만 원 정도인 데다 낮에는 관광객들에게 이곳을 오픈하여 입장료를 벌어들이고 밤에야 회의를 개최하는 이유는 의원들이 낮에는 생업에 종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추운 나라라 에어컨 시설이  거의 없어 요즘처럼 더울 때는 문을 열어 놓고 있다.


벽에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는 것은 추울 때 이곳을 통하여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한다.


방 전체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황금 방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작은 모자이크를 붙여 만들었는데 그것은 진짜 금으로 만들어졌다. 스톡홀름을 보호한다는 멜라렌 호수의 여신이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황금 방은 블루홀에서 만찬을 끝낸 노벨상 수상자들이 만찬 후 무도회를 즐기는 곳이다.




처음 빙하가 녹아내리며 어부와 사냥꾼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스웨덴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이킹 활동이 활발하던 800년부터 1050년 까지다. 그 후 기독교가 전파되고 문명이 발달하며 원시적인 바이킹 문화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슬로츠바켄에서  감라스탄으로 가는길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칼 14세 요한의 청동 기마상. 이른 나이에 국왕에 올라 많은 전쟁을 치르다 36살에 노르웨이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한동안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 세나라는 강대국인 독일에 맞서 대응해야 했으니  스웨덴의 항구도시 칼마르에 모여 힘을 합치기로 칼마르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1400년 초부터 스웨덴에서는 덴마크의 높은 세금과 독선적 통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투쟁을 일으켰다. 그 후 스웨덴은 동맹은 유지하되 독립된 왕권을 지닌 국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때 스웨덴 내에서는 왕위 쟁탈로 분열이 발생했고 덴마크는 절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스웨덴 왕을 지지하는 세력 82 명을  스토르토르예트 광장에서 죽여 광장과 거리는 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것이 발화점이 되어 해방을 위한 투쟁은 끝없이 이어졌고 1523년이 되어서야 완전한 독립을 얻게 되었다.


스톡홀름 궁전


스웨덴은 입헌군주제이나 국왕이 따로 있다. 국왕은 국가 원수의 지위는 가졌지만 정치적인 권한은 없는 것이 다. 현재의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는 올림픽 경기 참관 중 통역을 담당했던 일반인과 결혼했고 그의 세 자녀 또한 일반인과 결혼했다. 그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은 헬스클럽에서 만난 담당 트레이너와 결혼한 빅토리아 왕세녀다. 그들의 소탈한 모습은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구시가지'라는 뜻의 감라스탄은 스타스 홀멘이라는 작은 섬에 있다. 스토르토르예트(큰 광장이라는 뜻) 광장은 많은 관광객들로 붐볐고 주변에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가득했다. 돌로 된 바닥과  알록달록한 건물이 내는 분위기는 다른 유럽 국가의 오래된 도시에서 보던 풍경과 같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서 만나는 상점들의 귀엽고 정감 어린 모습에 한눈팔다가는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다.


해골의 샘이란 별명을 가진 우물이 있는 곳이 학살의 피바다 사건이 일었던 곳이다.


노벨의 생애와 노벨상에 대해 전시하고 있는 노벨 박물관


알프레드 노벨은 아버지의 폭약 공장 폭발 사고 후 안전한 폭약을 개발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유럽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의도와 달리 폭약이 살상 무기로 악용되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벨이 사망하고 그의 유언장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금을 인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해 달라고 써놓은 덕분에 현재까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6개 분야에서 선발된 수상자에게 노벨상이 주어지는데, 노벨 평화상만 오슬로에서 진행하고 나머지 5개는 스톡홀름에서 주고 있다. 



빛 바랜 골목길이 얼기설기 이어진 것이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교회 뒤뜰에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작은 동상은 리스 에릭슨의 '아이언 보이'다.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동상은 오래전 스톡홀름 항에서 선박의 짐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던 아이가 힘든 노동과 배고픔에 지쳐 숨지자 그처럼 안타깝게 죽은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작가는 원래 취지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하나 그로 인해 안쓰러운 영혼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17세기 스웨덴의 막강했던 국력을 보여주는 거대한 전함이 유고르덴에 보존되어 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야심작으로  폴란드를 향해 첫 항해를 나갔다가 무기와 선원을 무리하게 싫는 바람에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아 희생자는 많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바다 깊숙이 잠겨 있다가 1961년 해양 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센에 의해 인양되고 복원되어 옮겨진 '바사호'는 최고의 유산이 되었다.


바사 박물관의 배에는 사자 모양이 있는데 이는 스웨덴 왕실의 소유라는 의미다.


기세 등등하게 출항했던 배의 침몰 사실은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고 말았다.


박물관은 7개의 층으로 이뤄져 있어 다양한 높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역사 시간에도 잘 배우지 못했던 멀고 먼 나라 스웨덴. 그저 복지국가로 잘 사는 나라라고만 생각했었다. 아주 짧은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만 시청사라도 와보고 감라스탄을 걸으며 그들이 살아온 역사를 되짚어 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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