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의 유적지는 17세기부터 유럽 사람들이 즐겨 찾던 여행지다. 그중 나일강 근처에 있는 신전 관광은 주로 크루즈로 진행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이라는 추리 소설을 낳게 한 아스완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북유럽 여행 때 탔던 크루즈와 달리 객실이 컸고, 강이라 그런지 배의 흔들림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배처럼 웅장하고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옥상에는 수영장도 있고 바도 있어 음료 한 잔 마시며 붉은 사막과 나일강 주변의 독특한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저녁 식사 후 열리는 벨리댄스나 수피댄스의 공연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벨리댄스는 우리가 많이 접했지만 종교의식이 전통 춤으로 변했다는 수피댄스는 처음이다. 둥글게 생긴 원반 같은 것을 몸에 두르고 내면의 세계를 표현한다며 30분 정도는 돌고 또 돌았다.
인터넷 연결이 시원치 않은 것과 거의 비슷한 메뉴의 식사를 계속해야 하는 것만 빼면 좋았다.
나일강 유역은 좁은 농경지대를 제외하고는 그 일대 전체가 불모의 사막지대다. 붉은 사막과 나일강의 푸르른 조화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나일강 동안에는 콤옴보 신전, 에드푸 신전, 카르나크 신전, 룩소르 신전 등 아크로 폴리스라 불리는 유적들이 있다.
황금의 언덕이라는 콤옴보 신전
약 2,200년 전에 세웠다는 콤옴보(아라비아어로 올림포스 언덕을 의미) 신전은 남쪽은 악어머리 형상을 한 소베크 신을, 북쪽은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 신을 모시고 있어 제단도 두 개고 열주도 이중으로 되어 있다. 그 규모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조명이 비치자 훼손된 모습까지도 환상적이다.
붉은 사암으로 지었다는 신전은 성벽의 일부와 원기둥 몇 개, 신상 봉안소 일부와 마미시 정도만 남아 있는데 부서진 곳도 많다.
왕에게 따오기 머리의 토트와 매 머리의 호루스가 생명수를 뿌리고 있다.
천정은 일부만 남은 채 성소로 이어지는 문들이 길게 이어져 있다. 신전에는 신들에게 다양한 공양물을 바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영생을 얻으면 갈대밭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고 생활한다고 생각해 파피루스와 연꽃을 그렸고 산통을 줄이기 위해 앉아서 출산하는 장면을 그리는 등 생각과 생활상이 표현되어 있다
파종기, 수확기, 강의 범람기 등을 기록한 달력과 돌만 쌓아 올리면 석조건물이 취약해 홈을 파서 나무 쐐기를 박아 물을 부어 돌이 흔들리지 않게 한 자국도 남아 있다.
우물처럼 깊게 판 것은 나일로미터로 파라오가 홍수를 예측하던 장치다.
나일강 주변에서 농사를 지으며 나룻배로 이동하던 테베 사람들에게 강에 사는 악어는 꽤나 위협적인 동물이었을 게다. 그들은 악어도 신으로 모시며 미라로 만들어 영원한 삶을 얻게 했다.
사막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선한 형제와 악한 형제가 이곳을 통치했는데 악한 형제가 선한 형제를 몰아내고 통치를 하게 되었다. 악한 형제들은 점점 백성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이윽고 악한 형제들이 백성들을 다 쫓아버리고 나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어졌다. 그래서 죽은 망자까지 소환해서 밭을 일구다 보니 저주를 받아 경작지가 다 모래로 변했다고 한다.
호루스신을 모신 에드푸 신전
에드푸 신전까지는 버스로 이동할 수도 있으나 꼭 마차를 이용하여야 한단다.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시간, 크루즈 근처에는 이미 대기하고 있는 말과 마부들로 떠들썩했다. 지나가는 마차를 보며 한 번쯤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잠도 덜 깬 채 캄캄한 도시를 달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에 팁을 요구하는 그들의 문화 속에 우리는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었다. 과연 팁을 얼마나 요구할지 몰라 잔뜩 긴장한 우리는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호의도 무시하다 보니 우리 부부는 마차를 탄 사진조차 없다.
얼마를 달렸을까 마부는 갑자기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길가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따다가 내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달랑 2 달러와 크루즈에서 나눠 준 샌드위치 만을 전하고는 쌩하니 내려서 바쁘게 우리 일행에게 갔다. 친절했던 그에게 좀 더 호의를 베풀걸 하는 후회가 든 건 그가 눈앞에서 사라진 후였다.
기원전 이삼천 년 전에 세워진 다른 신전들에 비해 기원전 57 년에 세운 에드푸 신전은 최근의 건축물이다.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국교가 기독교로 바뀌는 바람에 신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고 오랜동안 모래에 파묻혀 있었다. 덕분에 원형은 잘 보존되어 있다.
프롤레마이오스 7세가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정문에 새겨져 있다.
호루스가 하늘 높이 날다가 지상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싶은 명당 에드푸를 발견해서 지었다고 해서 '호루스의 횃대'라고도 한다. 신전 앞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매가 탑문을 지키고 있다. 다른 신전에서 보던 사람의 몸에 머리만 매의 형상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새의 모습을 하고 있건만 그 위세에 가까이 가기조차 머뭇거려진다.
오른쪽 벽화는 제일 왼쪽 위부터 천지를 창조한 태양신 라부터 공기의 신 슈와 습기의 여신 테프뉴트 등 이집트의 신들이 조각되었다
첫 번째 만나는 회랑에는 32개의 열주들이 있는데 긱 기둥마다 섬세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신전 안의 회랑에는 또다시 거대한 기둥들이 있는데 천정의 검은 얼룩은 이교도들의 침입에 의한 방화 때문이라고 한다.
신전은 외부의 벽까지도 빽빽하게 조각이 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이집트의 신화다. 신화 내용을 알고 보면 더욱 흥미를 느낄 수 있다.
통치권은 태양신인 라에게서 게브에게로 또다시 오시리스에게로 넘어갔다. 성군이었던 오시리스를 질투하던 신이 있었으니 혼돈과 사막의 신 세트다. 그는 형의 권위와 명예를 꺾고 싶어했다. 어느 날 연회 중 오시리스에게 딱 맞는 관을 만들어 들어가 보라고 한다. 죽음을 신성시했던 시대에 화려한 관을 선사하는 것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형이 들어가자 세트는 급히 관 뚜껑을 봉하고는 나일강에 버리고 말았다.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는 수소문 끝에 남편을 찾아내서 아이를 낳으니 호루스다. 그러나 호루스는 신이 아닌 인간이었고 이미 죽은 오시리스는 저승의 왕이 되었다.
벽화에서 호루스는 긴 작살을 가지고 하마로 변한 세트를 찌르고 있다. 그의 아버지 오시리스를 죽인 세트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벽 아래는 나일강의 수위를 측정하는 나일로 메타가 있다. 농사에 가장 중요했던 나일강 수위에 대한 예측은 파라오의 중요한 업무였다. 그들은 신에게 나일강이 범람해 불모의 땅이 농경지로 변하게 해달라고 바라지는 않았을까?
일식에 관한 이집트 신화 이야기
태양신 라는 낮 동안에는 맘제트라는 배를 타고 천상의 나일강인 은하수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두아트라는 계곡을 지난다. 지하 세계인 두아트로 들어가면 밤이 되고만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에는 늘 거대한 뱀 아포피스가 길을 가로막고 태양신 라와 싸움을 한다. 가끔 태양신 라가 뱀에 잡아먹혀 낮에도 해가 비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일식이다.
가장 크고 오래된 카르나크 신전
나일강 동안의 북쪽, 고대 이집트어로 이페트수트(고르고 고른 땅을 뜻한다)라고 하는 지역은 천여 년 동안 이집트의 수도였다. 약 4천 년 전에 지어진 카르나크 신전은 천년 넘게 증축에 증축을 거듭하다 보니 신전의 구조는 복잡해졌고 그 규모는 100 헥타르가 넘게 되었다. 이곳 역시 이슬람 문화가 들어오며 모래 속에 파묻혔다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곳이다.
(오페트 축제)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 테베에서는 나일강이 범람하는 때에 맞춰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가 열렸다. 사제단은 카르나크 신전에서 3 킬로미터 떨어진 룩소르 신전까지 테베의 3신(아몬, 콘수, 무트)의 신상을 '신성한 배'에 태우고는 사자의 몸에 숫 양의 머리를 한 스핑크스들이 도열해 있는 '스핑크스 참배로'를 지나 룩소르 신전으로 이동하였다.
퍼레이드를 벌이면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신에게 꽃을 바치고 향수를 뿌리고 고기와 술을 올리며 풍년을 기원했다. 그렇게 열흘 이상 지속되던 축제가 끝나면 테베의 삼신은 다시 원래의 카르나크 신전으로 돌아갔다.
테베의 삼신은 아몬 신과 그의 아들 콘수 그리고 부인이었던 무트다. 룩소르 신전까지 테베의 삼신을 옮기던 신성한 배
이집트에서 가장 크다는 카르나크 신전의 탑문 벽에는 다른 곳과 달리 그림이나 부조가 없다. 2,30 미터 높이의 건물 사이로 6개의 탑문을 지나면 지성소가 나타난다.
룩소르 신전까지 스핑크스가 이처럼 길게 이어진 길을 스핑크스 참배로라 한다.
탑문의 안쪽에 흙을 쌓은 후 탑문을 쌓아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탑문을 지나면 거대한 돌기둥 숲이 나온다. 꽃봉오리 모양의 파피루스로 장식되어 있다. 우람한 열주들이 어찌나 큰지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파피루스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원초의 바다에 태양 빛이 비쳐 천지가 창조되는 창조신화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
투트메스1세,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
이집트 신화는 최초의 바다에서 시작한다. 최초의 바다를 상징하는 호수에서 제사장들은 청결의식을 했다. 이 청결의식이 기독교의 세례의식으로 넘어가지 않았나 하고 추측한다고 한다.
룩소르 신전
조명이 켜진 룩소르 신전은 화려했다. 그런데 제1 탑문 앞에 하나뿐인 오벨리스크가 부자연스럽다. 원래 한 쌍이었는데 현재 그 하나가 프랑스 파리 콩코드 광장에 있다. 약탈 당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를 통치하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의 샤를르 10세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많은 오벨리스크 중 하필이면 쌍으로 있어야 할 정문 앞의 오벨리스크를 선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함마드 알리는 무기의 수입이나 협상을 위해서라면 미국이나 영국에도 유물들을 마구 집어 주곤 했단다.
제1 탑문 앞에는 람세스 2세가 세운 오벨리스크(받침대에 4마리의 개코 원숭이가 새겨져 있다.)가 있고 또 하나는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 있다.
탐문 안으로 들어가면 파피루스와 로터스를 나타내는 거대한 기둥이 많다. 이러한 기둥들이 하늘을 받치고 있으면 이를 통해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많은 돌기둥을 세웠다고 한다.
탑문을 지키고 있는 람세스 2세와 72개의 파피루스 기둥이 에워싸고 있는 안마당이 나온다
룩소르 신전에는 카르나크 신전에서 신성한 배를 타고 모셔온 신상을 보관하던 곳이 있는가 하면 서기 395년에 이집트의 콥트 교인들이 교회로 개조한 흔적도 있고, 640년에는 이슬람교도들이 만든 아부엘 하가그 모스크도 있다.
모스크는 나일강의 반대 방향인 서쪽을 향해 있는데 모스크의 말발굽 모양의 아치 모양이나 아라베스크 문양 그리고 이집트 여인들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든 마슈라바야가 있는 것이 이슬람 건축물의 특징이다.
바크신당과 아부 엘 하가그 모스크. 이집트 여인들이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촘촘히 나무로 무늬를 낸 창문(마슈라바야)이 눈에 띈다.
둘째 안마당은 64개의 파피루스 기둥이 안마당의 삼면을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고 32개의 기둥이 서있는 작은 기둥홀이 있다.
둘째 안마당 열주실의 한가운데는 성소가 있고 양 옆의 기둥은 아칸서스 잎 모양으로 장식했다.
그 안쪽에 두 개의 전실이 있는데 그 전실은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콥트 교회의 예배장소로 사용했다. 꼭대기 대들보를 보면 원래의 부조 위에 회반죽을 칠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12제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는 성화를 그렸다. 그 외에도 벽화를 뜯어버리고 성당을 상징하는 돔 형태의 입구를 만들기도 했다.
3개의 종교가 어우러진 오묘한 분위기는 조화롭다기보다는 약탈자들의 횡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콥트교의 성화와 어린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
아크로 폴리스(신의 세계)라는 나일강 동안의 각 신전을 관람할 때는 이집트의 신화를 숙지하고 가는 것이 좋다. 인간과 너무나 같은 신들의 이야기, 신에게 강력한 힘을 받아 신이 되고자 했던 파라오들의 이야기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들의 생활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석조 건축물이었기에 몇 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정말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큰 건축물을 만들고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나일강 서안에는 죽은 자들의 무덤인 네크로 폴리스가 있다. 대부분 도굴당하고 텅 빈 무덤만 남았다는 왕가의 계곡은 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