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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Jan 26. 2023

죽은 자의 세상, 네크로폴리스

하트셉슈트 장제전,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왕가의 계곡

차창 밖 풍경이 독특하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뤄져 지평선을 볼 수 없는 우리나라와 달리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는 거칠고 푸석한 모래뿐이다.  푸른 산 만을 보고 자라서인지 붉은 산 또한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삭막한 땅이 이집트에서는 아주 요긴하게 죽은 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네크로 폴리스에는 수천 년 전에 죽은 파라오의 집인 암굴무덤과 장제전이 있다. 무덤 대부분은 도굴로 인해 텅 비어 있지만 용케도  도굴당하지 않고 남아 있던 미라와 부장품들은 카이로의 고고학 박물관에 안치되어 찬란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비록 군데군데 부서지기는 했어도 돌로 만든 거대한 건축물은 옛 그 자리에서 웅장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건축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피와 땀을 흘렸을까? 


아멘호테프 3세의 멤논 거상

콤엘헤이탄의 너른 벌판에 우뚝 서있는 거상은 아멘호테프 3세 상이다. 나일강 가까이 지었던 탓에 그의 장제전은 어느 해인가 홍수로 떠내려가 버렸고 그 앞에 세웠던 아멘호테프 3세의 거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리스인들이 와보고는  '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아가멤논을 닮았다'라고 해서 지금도 '멤논의 거상'이라 한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승에서 사는 삶은 짧고 죽은 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파라오 등 권위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덤을 정성껏 치장했다. 무덤 안에 저승에서 돌아온 영혼이 영생을 누릴 몸은 미라로 만들고, 내장은 따로 카노푸스라는 단지에 보관했다. 부장품으로  호화로운 금은보화부터 체스판에 이르기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상 잡화와 '샤브티'라고 부르는 노동을 대신해 줄 사람의 조각까지 돌이나 청동으로 만들어 넣었다. 벽에는 무덤 주인에 관한 벽화가 빽빽하게 그려졌고  상형문자로 주인의 이름까지 새겼다.


병풍 같은 절벽에 둘러싸여 있는 하트셉수트 장제전

장제전이란 파라오들의 장례의식을 치르던 신전이다. 고왕국이나 중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 옆 예배실에서 장례의식을 치렀으나 신왕국시대에는 무덤은 계곡의 바위 속에 꽁꽁 숨겨놓고 장제전을 별도로 지었다. 


18 왕조의 하트셉수트(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뜻)는 최초의 여성 파라오다. 그녀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신전을 짓는가 하면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기는 아멘 신과 어머니가 결혼해서 낳은 딸이다'라는 탄생 신화까지 만들고 늘 남장을 하고 수염까지 달고 다녔다. 


네모반듯한 장제전 건물은 현대의 건물 같다.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 중인 하트셉수트 두상


하트셉수트 여왕은 정복 전쟁보다는 푼트(소말리아 인근으로 추측) 등과 우방 관계를 맺으며 평화적인 통상 무역을 하며 우호적 교류를 확대하고 국부를 축적하는 방식의 통치를 하며 번영의 시대를 누렸다. 그녀는 장제전 외에도 카르나크 신전을 확장하는가 하면 자신의 대형 오벨리스크도 세웠다.


목재가 귀한 이집트에 3,400 년 전에 무역으로 들여왔던 나무가 있었던 자리


그녀의 남편인 투트모스 2세는 병약하여 5년 만에 죽었다. 자신의 아들이 없던 하트셉수트는 처음에는 후궁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가 스스로 여왕 자리에 오르고는 투트모스 3세와 자기의 친딸을 결혼시켰다. 그녀는 투트모스 3세의 양어머니이자 장모가 된 것이다.  여왕이 죽은 후 투트모스 3세는 모든 기록에서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우고 신전 벽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훼손하는가 하면 여왕의 딸이자 자신의 부인이었던 네페루레의 이름까지도 지워버렸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은 현재 화려하게 복원되어 세계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죽어서 오시리스가 된 하트셉수트


사막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물고기나 오리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 것은 교역국이었던 푼트의 모습이라고 한다.  천정에는 하늘에 떠있는 별을 그렸다.


이 장제전도 7세기 무렵에는 콥트교의 수도원으로, 16세기에는 교회로 사용되었다.

장제전 가장 안쪽의 지성소와 장제전 앞을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


메마른 바위산 깊숙한 곳에 있는 왕들의 무덤, 왕가의 계곡

고왕국과 중왕국시대에는 거대하게 피라미드를 세우며 죽은 파라오의 재생과 부활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도굴꾼들의 끊임없는 도굴로 인해 부장품은 물론이요 미라까지 없어지자 신왕국시대(18 왕조~ 20 왕조)부터는 무덤을 눈에 띄지 않게 숨기기 위해  비가 와도 침수가 되지 않는 바위산을 뚫고 암굴무덤을 만들었다. 



프톨레마이우스 때 이집트는 로마에게 정복당했고 이슬람이 들어오며 3천여 년 동안 왕가의 계곡 또한 모래에 묻히며 잊혔다.  19세기 고고학 붐이 일며 시작된 발굴로 총 64기(24기가 파라오의 무덤)나 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현재  관람이 가능한 10여 곳 대부분은 텅텅 비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채색된 벽화와 카르투슈에 새겨진 파라오의 이름뿐이다. 수십 기의 무덤은 KV1, KV2라고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바로 발굴된 순서다.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투탕카멘의 무덤

다른 파라오에 비해 어려서 죽은 투탕카멘의 작고 초라한 무덤은 바로 위에  다른 파라오의 무덤을 짓느라 옮겨온 돌과 토사로 무덤 입구가 막혀 있었다.  1922년 하워드 카터의 발굴로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고 무덤 안에 있던 3천여 점의 호화찬란한 유물들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작은 무덤 안에 이토록 많은 유물이 있었다면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 안에는 얼마나 많은 유물이 있었을까? 


유물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상한 곳도 없고 색채까지도 선명했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는 11 킬로그램이나 되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석영과 흑요석으로 만든 눈은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 그 외에도 터키석과 루비, 청옥과 금으로 만든 찬란한 금팔찌와 브로치, 보석함과 조각품, 장신구와 가구들은 대부분 금으로 세공되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현재 무덤 안에는 유일하게 투탕카멘의 미라를 석관에 보관 중이고 주요 유물들은  카이로의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2층 특별실에 전시 중이다.  지난 해로 발굴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은  손을 빨고 있다. 황금가면(위키피디아)


카노푸스 사당은 왕의 장기를 보관하는 함을 넣는 곳이다. 외벽에는 한 면에 하나씩 궤를 감싸 안고 있는 여신들의 조각이 붙어 있는데 간장을 지키는 여신 이시스, 폐를 지키는 여신 네프티스, 위를 지키는 신 네이트, 장을 지키는 신 세르케트가 사당을 보호하고 있다.


카노푸스 사당(좌)과 카노푸스 항아리


온통 금으로 세공되어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의자


'파라오의 무덤을 파헤친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모두 일찍 죽는다'라는 투탕카멘의 저주설이 있는데 실제로 하워드 카터도 오래 살지 못했고 그가 키우는 앵무새마저 코브라에 물려 죽는가 하면 발굴에 참여했던 주위 사람들도 연이어 사망했다. 그것을 보고 파라오의 저주가 내린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으나  발굴에 참여한 몇 천명의 사람 중 몇 십 명 죽은 것은 자연사의 수준이라는 주장도 있다. 


채색벽화가 돋보이는 네페르타리의 무덤

태양은 왕비를 위해 있다며 내세에서도 아름다운 왕비와의 사랑이 계속되기를 기원했던 람세스 2세는 왕비의 무덤을 크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네페르타리 무덤이 유명한 것은 많은(98기 정도) 왕비의 무덤 중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가 조금도 변색되거나 탈색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벽화는 죽은 왕비가 마법의 힘에 의해 부활하여 영생을 한다는 내용이고 미라가 된 왕비의 유해와 여신들의 모습이 그려진 황금의 방이라고 부르는 널방까지도 화려한 벽화가 가득하다. 




자칼 머리를 한 것이 아노비스로 저승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집트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고고학 박물관 

1902년 타흐리르 광장에 개관했던 고고학 박물관에는 선사시대부터 그레코로만 시대 초기에 이르는 유물 13만 점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굴한 유물로 당시의 생활 모습 등을 엿볼 수 있다.

 

건물이  오래되어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으로 옮기려 했으나 코로나 등으로 이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일부는 이전이 된 상황이라  유물들은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는 데다 많은 인파로 천천히 유물을 감상할 수가 없었다. 1층에는 이집트 왕조의 연대에 따라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람세스 2세 등 고대 이집트를 빛냈던 파라오의 동상들이 맨 먼저 우리를 맞이한다.


어디에 가든 람세스 2세 상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양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있는 것은 죽어 신이 된 모습이요 왼발을 앞으로 내디딘 모습은 살아있는 모습이다.


로제타 스톤은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로제타 지역에서 발견한 비석으로 고대 이집트어를 해독을 할 수 있게 한 중요 자료가 되었다. 이집트 원정에 실패한 프랑스군이 본국으로 무사 귀환하는 조건으로 영국에 넘겨진 로제타 스톤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집트 정부는  반환을 요구했으나 매번 거절되었다. 


그동안 많은 언어학자들의 노력에도 상형문자의 해독을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발견된 로제타 스톤에는 동일 내용을 신성문자와 민중문자 그리스문자로 적혀 있었다.  그 비석으로 고대 이집트어가 뜻글자가 아니라 소리글자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마침내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한 것이다


전시되어 있는 로제타 스톤은 모조품으로 진품은 대영박물관에 있다. 미라가 들어있던 석관에는 카르투시가 있어 어느 파라오인지를 알 수 있다(우)


이집트 통일 과정을 표현한 나르메르 팔레트로 상형문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 상(좌), 쿠푸왕의 피라미드에서 발견한 높이 7.5 센티미터의 쿠푸왕의 좌상으로 피라미드의 주인을 알게 되었다.


눈이 살아 있는 듯한 엘 벨레드의 목재상(좌), 이집트 200 파운드 화폐의 인물(중), 라호테프와 네페르트 부부 조각상(우)


람세스 2세의 파리 나들이

박물관에 옮겨졌던 람세스 2세의 미라에 어느 날 병증이 나타났다. 그 미라를 치료하기 위해 100여 명의 치료팀이 구성되었고 미라는 프랑스까지 옮겨져 균들을 제거한 후에 돌아왔다. 시신이라 해도 이동할 때는 여권이 있어야 해서 만들어진 여권에는 나이 3200세, 직업은 국왕, 방문 목적은 신병 치료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설 특집으로 방송된 '십계'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사실 몇 번이고 방송되는 것을 본 것 같은데 너무 길기만 한 영화를 보며 재미있다기보다는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집트에 막 다녀온 지금은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 내용이 아닌 영화에 나오는 건물이라든지 사람들의 옷과 독특한 헤어스타일 등이다.


신전 등 벽화에서 봤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럴듯한 그 시대의 배경과 광활한 사막을 마차를 타고 달리는 모습과 홍해를 가운데 두고 시나이 반도로 넘어가는 모세의 이야기가 정말 그럴듯하게 다가왔다. 인류 최초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이집트로의 여행을 떠날 때는 꼭 이집트 신화나 영화 십계를 보고 가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도굴꾼들이 훔쳐 간 그 많은 유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자신의 몸이 미라로 되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는 파라오의 심정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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