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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Feb 04. 2023

피라미드를 만나다

기자 피라미드, 멤피스 박물관, 후르가다

인류 최초의 문명을 찾아 카이로에 온 지도 어느새 열흘이 다 되어간다. 오늘은 드디어 피라미드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100년도 살기 힘든 나로서는 사천 년 전의 시간이란 가늠조차 안 된다. 4,700년 전이라면 이제 겨우 청동기 문화가 생겨나고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신화도 나오지 않았을 때 아닌가? 


고고학자 세람은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최초의 회의가 열릴 무렵 이집트는 이미 피라미드와 오벨리스크를 완성시킨 지 수천 년이 지난 대국이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오래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는 건물 한 채 지으면 몇 백 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물고 짓기를 거듭한다. 그런데 무려 사천 년 전에, 올려다보기도 힘들 정도의 높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고,  지금도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아마도 사막에 그것도 목재가 아닌 돌로 지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4세기 초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이 부흥하면서 서서히 그 막을 내렸고 불가사의한 유적지는 모래바람에 묻히고 말았다. 19세기 초 고고학자들이 사막의 모래 땅을 파헤치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아직도 발굴되지 않고 모래사막에 묻혀 있는 또 다른 유적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발굴을 위하여 모래 바닥을 파헤치고 있다


나일강 저 남쪽 아부심벨 신전부터 왕가의 계곡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오다 보니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의외로 수도인 카이로 가까이에 있었다. 또 너른 모래 벌판에 덩그러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피라미드는 잿빛 도시 바로 옆에 있었다.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 안에서 발견된 7.5 센티미터의 쿠푸왕의 조각


정사각뿔 모양을 한 건축물은 수메르 아시리아 등에도 있으나 피라미드는 그중 가장 오래되고 크고 정밀하여 7대 불가사의로 꼽히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의 무덤이었다. 물론 그 안에 유해나 유물은 죄다 도굴당하고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벽화뿐이다. 아니 지금도 피라미드 안 어딘가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에서 기자의 피라미드까지

태양신을 믿었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신과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파라오가 영원한 삶을 얻게 하기 위하여 피라미드를 높이 또 높이 쌓아 올려 하늘에 닿게 했다. 왕비와 왕족 귀족들의 공동묘지였던 네크로 폴리스의 서쪽에는 이집트 최초로 직사각형 모양의 마스타바를 몇 개 쌓아 올린 사카라 피라미드(계단식 피라미드)가, 북쪽에는 태양신전 유적이 있는 아부시르와 고왕국 4 왕조시대에 절정을 이룬 거대한 세 피라미드가, 남쪽에는 굽은 피라미드와 붉은 피라미드가 있는 다슈 그리고 무너진 피라미드가 있는 메이듐이 있다.


최초로 만들어진 사카라 피라미드




내부는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7세기말에는 기자(강 건너에 있는 마을을 뜻한다)에 가려면 배로 나일강을 건너고 당나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피라미드를 빨리 보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어지간히도 복잡한 도로는 버스를 꼼짝도 못 하게 했다. 드디어 도착한 모래펄에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었고 나는 그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아래를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개미떼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내부 관람을 위하여 입장하는 곳은 원래의 입구가 아니라 도굴꾼들이 파놓은 곳이란다.


독특하게 긴 옷을 차려입은 이집트 사람들은 낙타와 마차를 몰며 호객행위를 하느라 꽤나 시끄러웠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피라미드를 올려다보며  한동안 그 넓은 벌판을 헤매고 다녔다. 피라미드에 쌓아 올려진 돌은 평균 높이가 50 센티미터, 무게가 2.5t이나 나가는 돌 230만 개를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210단이나 쌓아 올렸다. 그중 꼭대기 7단이 무너져 지금은 203단이 남아 있다. 이게 어떻게 그 옛날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피라미드의 수호신은 스핑크스

쿠푸와 카프라의 피라미드에서 약 300여 미터쯤 아래에는 피라미드의 수호신인 스핑크스가 의젓하게 앉아 있다. 사람의 몸에 동물의 얼굴을 했던 신전의 동상과 달리, 사자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는 파라오를 상징하는 두건까지 썼다. 비록 코와 수염은 부서졌지만 그 위풍당당함에 금세  주눅이 들고 만다.




스핑크스의 코와 수염은 망가졌다. 코가 없으면 파라오가 부활할 수 없다는 이집트의 전설을 들은 나폴레옹의 병정들이 망가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상형문자를 해독하게 한 로제타스톤과 함께 그  부서진 스핑크스의 턱수염은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단다.


몸의 길이가 73 미터 높이가 22미터나 되는 스핑크스는 현재 몸에 틈이 생기기 시작해 머리가 떨어질 위험에 처하자 주위에 철책이 쳐지고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거대한 피라미드의 건설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많은 재정부담과 건축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데다 내놓고 화려하게 왕의 무덤을 만들어 놓으면 도굴꾼에게 도굴당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 후에는 바위 산에 굴을 파서 암굴무덤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바로 왕가의 계곡이다.


첫 왕도였던 멤피스는

이집트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후의 세상을 중요시했다더니 신전이나 무덤은 이곳저곳에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파라오가 생전에 살았던 왕궁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첫 왕도였던 멤피스(피라미드의 아름다움은 영원하다는 뜻으로 그리스인들이 붙인 이름)는 그저 평범한 농촌 마을에 박물관이 있다.


멤피스 박물관 안마당의 안쪽에는 높이 7 미터의 람세스 2세의 입상이 있는데 왼발을 한 발자국 앞으로 내밀고 있다.


마당의 중앙에 있는 스핑크스는 제8 왕조의 아멘호테프 2세 때 만들어진 것으로 프타 신전에 있던 것을 이곳에 옮겨 놓은 것으로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다


멤피스 박물관에는 이집트 유적지 어디에서나 보았던 람세스 2세의 거상이 또 있다. 프타 신전을 확장하면서 세웠던 거상 중 하나로 1820년에  늪에 처박혀 있던 것을 발굴한 것이다. 왕관의 일부와 무릎 이하 그리고 한쪽 팔꿈치는 떨어져 나갔고 어깨에 새겨져 있는 카르투시에는 람세스 3세가 람세스 2세의 이름을 깎아내고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았다. 


워낙 큰 거상을 자세히 보려면 박물관 2층에 올라가서 봐야 한다.


이집트에도 이런 곳이!

처음 공항에서 내려서는 폭격을 맞은듯한 카이로의 모습에 놀랐고, 꿉꿉했던 야간열차의 시설에 놀랐고, 부서지고 깨졌지만 늠름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던 거대한 석조 건축물에 놀랐던 우리는 홍해 바다 앞의 멋진 후르가다에서 또다시 놀랐다. 이곳은 별천지였다. 정말 이곳에 들르지 않았다면 무언가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여행사의 배려로 음료 주류가 무제한인 고급 호텔에서의 마지막 이틀간의 호캉스는 그동안의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검푸른 바다가 아니라 '쪽빛'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바다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았다. 다만 애써 준비해 온 수영복을 입어볼 수 없을 정도로 선선한 날씨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처음 즐겨본 호캉스는 그저 낙원이었다. 배가 고프면 다양한 요리가 준비된 뷔페 식당에 갔고, 해변을 거닐다가도 칵테일 한 잔 하고 싶으면 파라솔에 앉아 시켜 마셨고, 모래펄이나 수영장에서는 관광객들의 흥을 돋우며 같이 놀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화장실에서 휴지 한 장을 뽑아주면서도 1달러를 외치던 팁 문화에 인상을 썼던 우리는 칵테일 바에서 끝없이 주류를 가져다주는 직원에게 스스로 몇 달러를 건네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 그동안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아 암흑 속에 살았던 우리는 거의 열흘 만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급하게 연결할 일이 없는 우리는 여행을 가도 저녁에 호텔에 들어가면 대충 인터넷이 되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바다 끝은 수평선이 아니라 뿌옇게 땅이 보였다. 모세가 수많은 사람들을 끌고 바다를 가르며 건너갔던 곳은 어디쯤일까?  영화 '십계'에서의 멋진 장면과 함께 올드 카이로에서 들었던 아기 모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항상 해외에 나가면 느끼는 것은 내가 한국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 사는 나라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놀란 것은 이 이집트에서조차 코리아라는 말보다는 BTS라는 말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관광지에서 원달러를 외치며 따라다니던 아이들과 아부심벨에 가는 도중 휴게소 화장실에서 돈을 받으며 와들와들 떨고 있던 어린아이의 애잔한 모습과 함께 까무잡잡한 얼굴에 빛나던 이집트 사람들의 맑은 미소도 거대한 피라미드와 함께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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