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역 3번 출구, 살곶이 다리, 중랑천 송정 벚꽃길, 화양정터
"와~ 개나리다!"
"아니, 영춘화입니다"
아! 조금은 달랐다. 휘영청 하늘로 뻗어나간 가지에 듬성듬성 피는 개나리와 달리 마치 푸른 커튼을 친 듯 축축 늘어진 가지에 노란 팝콘을 뿌려놓은 꽃은 영춘화란다.
산수유와 매화에 이어 개나리와 영춘화도 봄을 맞이해 앙증맞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오늘은 단군의 유배길을 따라가 본다.
'살곶이 다리'를 아시나요?
한양대역에서 중랑천 쪽으로 조금 따라가면 살곶이 다리가 있다. 중랑천의 범람으로 이곳의 땅은 예부터 툭하면 물에 잠기기 일쑤라 땅이 아주 기름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그 땅에서 4 만 마리나 되는 말을 키웠고 그 말은 임금에게 올려졌다.
넓은 벌판에서 군대를 사열하는가 하면 왕족들은 이곳에서 매사냥을 즐기곤 했다. 우리나라의 매사냥(훈련된 매를 이용하여 사냥)은 유네스코에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특히 매사냥을 좋아했던 태종은 종종 비만이었던 세종을 데리고 자주 이곳을 찾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세조도 노산군(단종)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는데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그곳이 '살곶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태조와 태종의 일화 덕분이다. 태조는 조선 건국에 앞장섰던 이방원 등 전처소생의 자식들을 외면하고 신덕왕후의 아들인 방석이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방원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정도전과 함께 신덕왕후의 두 아들을 죽고 만다.
권력이 뭐길래 어떤 짓을 해서라도 올라야 하는가 보다. 하긴 창덕궁 인정전 문턱에서 용상을 바라보면 일월오봉도 아래 그 화려하고 기품 있는 자리만 봐도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렇지만 남도 아닌 형제와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왕에 올라야만 했을까?
왕위는 태조에게서 정종에게 승계되었지만 정종은 2년 만에 태종에게 왕위를 선위 한다. 드디어 태종은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유일하게 그를 인정하지 않고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 태조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했던 태종은 태조에게 도성에 돌아와 달라고 함흥에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모두 죽고 돌아오지 못해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겼다.
그렇게 태종을 애타게 했던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도성에 돌아오던 날 태종은 너무 반가워 지금의 살곶이 벌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냅다 화살을 쏘았다. 다행히 미리 예측하고 설치했던 구조물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태종을 보고 태조는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그 후 이곳은 '화살 꽂힌 벌판'이라는 뜻으로 살곶이라 불렸고 강 건너 사냥터로 가기 위해 세워진 78 미터나 되는 다리는 조선시대 만들어진 다리 중 가장 길다.
올봄에는 중랑천의 송정벚꽃길 한 번 걸어 보실래요?
요즘 어디를 가나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랑천 제방에는 송정벚꽃길이 있다. 중랑천을 따라 이어진 산책길에는 오래된 벚꽃 나무가 길 양 옆으로 줄지어 있는데 곧 봉우리를 터트릴 게다. 특히 이곳에는 개나리와 장미까지 있어 다양한 꽃을 감상할 수 있고 가을에 단풍이 들면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길은 열일곱 살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갔던 길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단종은 창덕궁을 나와 청계천 영도교를 지나 이 길을 지났다. 광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까지 닷새 또다시 영월까지 산 넘고 또 산을 넘어갔다(솔치재부터 청령포까지는 백리). 삼촌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길에 오른 후 끝내 참혹하게 죽어야 했던 단종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다.
작가 김별아의 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에는 처절했던 단종비(정순왕후)의 삶이 잘 그려져 있다. 정순왕후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두해 남짓 사랑했던 단종과 생이별을 한 후 뒷방 늙은이로, 걸인으로 살았다고 한다. 단종 나이 열일곱, 그녀의 나이 열여덟. 한 때는 만백성의 어머니로 중전이었던 그녀는 예순다섯이 될 때까지 그리움과 한으로 한평생을 보냈다.
화양정 터에는 노거수인 느티나무가!
화양동 주민센터 앞에는 어마무시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현재 수령이 650년~ 700년 정도라 한다. 원래 이곳에는 화양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벼락을 맞아 타버리고 그 터만 남았다. 단종은 유배길에 화양정을 바라보며 회행(回行) 길이 되었으면 했다. 백성들 또한 그가 돌아오기를 비는 마음에 회행정이라고도 했으나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반면 이 화행정은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 중에 잠시 쉬었다 간 곳이기도 하다. 단종과 달리 명성황후는 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말대로 회행정이 되었다.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석물의 주인은?
어릴 때 즐겨 찾던 어린이 대공원 유강원에는 석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는 조선 제27대 순종의 황후 순명효황후의 능이 있던 자리다. 순명효황후는 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죽어 이곳에 모셨다가 순종이 세상을 떠난 후 유릉에 함께 모셨다.
어린이 대공원에는 걷기 좋은 산책길은 물론이요, 실내 식물원에, 동물원, 게다가 능에 가야 볼 수 있는 석물에, 놀이동산까지 갖추고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다. 게다가 무료다.
단종이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로 떠났던 광나루 터에는 광나루터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옷깃으로 스며드는 찬 봄바람 때문일까? 슬픈 단종을 생각해서일까? 점차 구름이 많아지는 하늘처럼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 얹고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