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역 10번 출구
2호선 지하철 '선릉 역' 10번 출구에서 400여 미터 가면 선정릉이 있다.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왕릉에는 7 만 평이 넘는 넓은 녹지에 성종과 정현왕후의 동원이강릉(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과 중종의 단릉이 있다.
강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왕릉을 제외한 주변에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서다 보니 선정릉은 그 회색 도시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게 한다. 봄꽃이 하나 둘 피는 요즘 선정릉은 가벼운 산책을 즐기기 좋다.
궁능성시길을 다니다 보니 조선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오늘의 주인공은 성종과 중종이다. 조카(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임금이 된 세조에게는 두 아들(의경세자와 예종)이 있었으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의경세자(덕종)의 아들이었던 성종은 예종에 이어 13세에 왕이 되지만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그는 조선의 왕 중 폭군이었던 연산군의 아버지였는가 하면 그의 아들 연산군은 할머니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비운의 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경국대전과 대전속록 국조오례의 등을 완성하고 선비들을 등용하여 기존의 훈구세력과 국정의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그가 이토록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소혜왕후) 덕분이지 않을까?
성종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그중 두 번째 부인인 폐비 윤 씨의 아들이 연산군이다. 윤 씨가 사약을 받은 후 세 번째 왕비였던 정현왕후는 사랑으로 연산군을 키워 연산군은 그녀를 친엄마로 알며 왕이 되었다. 그러나 친모인 윤 씨에 대한 사실을 알고 난 후 연산군은 점점 폭군이 되어 갔다. 윤 씨에게 질투심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연산군도 성군이 되지 않았을까?
연산군은 친모인 윤 씨의 묘에 사당을 짓고 회릉이라 불렀으나 1506년 연산군의 폭정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중종반정을 일으킨 후 연산군은 폐위되고 회릉은 회묘로 낮춰 고양시 서삼릉 권역으로 옮겨졌다. 연산군의 묘는 양주에 아주 간소한 모습으로 남은데 비해 윤 씨의 회묘는 왕이었던 아들에 의해 왕릉의 모습으로 남았다.
반면에 왕위를 꿈꾸지도 않았던 중종은 반정으로 제11대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왕비가 있었다. 그런데 중종은 유독 첫 번째 부인인 단경왕후를 사랑하였지만 왕비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과 매부지간이라는 이유로 7일 만에 헤어지게 된다.
늘 인왕산을 바라보며 단경왕후를 그리워했던 중종과 중종을 그리워했던 단경왕후. 그녀는 인왕산 바위에 자신이 궁궐을 쫓겨나며 입었던 비단 다홍치마를 걸어두었다. 단경왕후와 중종의 따끈따끈한 사랑 이야기는 애달프다.
왕비가 셋이나 있고 특히 문정왕후 윤 씨는 중종과 함께 현재의 정릉에 묻히고 싶어 했으나 지대가 낮아 물에 자주 잠기는 바람에 중종은 홀로 이곳 선정릉에 묻히고 세 왕비는 태릉 등에 뿔뿔이 묻혔다.
문정왕후에 대해서 서경 목서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적혀있다. 왜 그녀는 사관들에게 그렇게 혹독한 평가를 받았을까? 명종의 모후로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하게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시였던 억불숭유를 무시하고 호불하는가 하면 그녀는 남성 지배층에게 아주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였다. 바꿔 말하면 그녀는 탁월한 정치가가 아니었을까?
질투쟁이 폐비윤 씨, 사랑꾼 단경왕후, 여걸 문정왕후를 떠올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석촌호수다. 아직은 벚꽃이 몽우리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지만 한 이주일 뒤에는 화려하게 변할 게다.
아, 보지 말 것을! 석촌호수 서호언덕에는 우리의 굴욕적인 역사의 한편을 볼 수 있다. 청나라와의 전쟁에 패하고 청의 요청에 따라 청태종의 공덕비를 우리의 손으로 세웠다. 너무 작다 하여 다시 좀 더 크게 만든 삼전도비는 왜 그렇게도 크던지...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인 문화의 날에는 관람료가 무료이므로 선정릉과 석촌호수로 나들이 가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