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가볼 만한 곳
황금 같은 연휴에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어디로 향할까 망설이다 선택한 곳은 전라북도 완주. 금요일부터 시작된 교통정체는 좀처럼 풀리지를 않고 가다 서기를 반복했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가슴이 부풀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봄에 벚꽃길이 예쁘다는 천년고찰 송광사다. 종남산 남쪽에 있는 송광사는 처음에는 백련사로 창건되었다가 정유재란 때 전소된 절은 중건을 거듭하다 1623년 조선 왕실의 후원사찰이 되며 지금처럼 대가람을 이루고 이름도 '소나무가 넓게 자리한다'는 뜻을 가진 송광사로 개칭하였다.
절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연등이 빽빽하게 채워진 연등탑도 새롭다. 절 입구의 큼지막한 연지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화려하게 핀 양귀비꽃과 금계국이 제대로 잔치 분위기를 내고 있다. 절 곳곳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수많은 등이 달려있다. 사람들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등을 달았을까? 아마 큰 것도 아니었을게다. 그저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빌지 않았을까?
송광사는 백화도량으로 관세음보살이 중생과 더불어 자비를 실천하는 도량이라고 한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소조삼존불상과 복장유물 그리고 종루 소조사천왕상 등 다양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송광사 대웅전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불화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벽 네 면에는 대웅보전 무량수전 보광명전 유리광전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그 법당 안에는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불상에서 땀이 흐른다는 소조삼존불이 있다.
기독교나 천주교에서의 예수님이나 마리아상은 대부분 비슷해 보이는데 불상은 절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눈매까지 살짝 올라가 엄하게 보이는 불상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온화한 불상도 있는데 송광사의 세 부처님은 무심하고 약간은 어눌해 보이는 것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극락전 나한전 지장전 등 다양한 전각들을 둘러보는데 저녁 시간을 알리는 범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울리는 맑은 소리로 다소 어수선했던 절의 분위기는 한층 가라앉으며 숙연해졌다. 그제야 처마 끝의 풍경 소리도 하늘을 나는 새소리도 들렸다.
절에서는 승려를 소집하고 경을 읽고 예불하는 것 등에 신호로 삼았다는 종소리. 특히 밤에 치는 종은 어두운 미혹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 친다고 한다.
불명산에 있는 화암사를 찾은 것은 다음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 창문을 열어보니 비구름이 온통 산중턱에 걸려 있다. 해발 480 미터 산 중턱에 있는 화암사에 가려면 적어도 30 분 정도는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한다기에 걱정부터 앞섰지만 몇 년 전 폭우가 내리던 날 내소사에서 바라보던 풍경을 떠올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어제 길을 꽉 메웠던 그 많던 차량과 사람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차는 우리뿐이다. 절에 가까워질수록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고 나의 걱정도 커졌다. 절로 향하기 전에 연화공주 정원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입구의 팻말을 보자마자 냉큼 차에서 내려 우산을 들고는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에 상상했던 근사한 정원은 보이지 않았지만 비 맞은 풀들이 내뿜는 상큼함이 가슴 가득 들어왔다. 한 5 미터 정도 들어갔을까? 웃자란 풀들이 온통 바지를 적시는 통에 더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숲만 바라봐야 했다.
그 옛날 임금에게는 연화 공주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어느 날 꿈에 나타난 부처님은 꽃잎 하나를 던져주었고 그 꽃을 찾아 헤매다 이곳 불명산 바위 위에 핀 복수초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꽃을 먹고 공주는 씻은 듯 병이 나았고 그곳에 절을 지으니 '바위 위에 꽃이 핀다는 화암사'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화암사까지 걸어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지만 잠시 들어가 보니 졸졸 흐르는 개울 옆으로 난 초록초록한 분위기가 마치 비밀의 정원 같다.
다행히 자동차로 절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거의 40 도 정도의 경사가 있는 길이었지만 이 길이 있음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잘 늙은 절, 화암사'라는 글을 보고는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화암사는 작고 아담했다. 절인 것을 알고 오지 않았으면 절인 줄도 모르고 지나칠 것 같다. 초록 이끼가 한참인 큰 바위 위에 쌓인 돌담이 정겹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원효와 의상이 유학하고 돌아와 수도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신라 문무왕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이 또한 천년고찰이다.
작은 산사에는 일주문 등이 생략되고 극락전 정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우화루다. 건물 옆에서 보면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정문에서 보면 2층 건물인 듯하나 안으로 들어가면 단층 건물처럼 보인다.
'ㅁ'자 모양으로 된 절 내부에서는 도란도란 대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혹시나 불청객이 될까 그저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언제 단청을 했는지 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목재는 원래의 결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지난 세월을 가늠케 한다. 아마도 이런 모습 때문에 잘 늙었다고 하나 보다.
우화루에 걸려있는 목어를 보니 며칠 전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웃고 말았다.
"절에서는 생선은 먹잖아. 절에 가면 생선 모형 걸어 놨던데!"
원 세상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나는 그저 말을 잇지 못했다.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 모양으로 목어와 목탁을 만들어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인데 말이다.
얼마 전 TV를 보니 요즘은 멍 때리기 대회도 열리는 가 보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우화루 마루에 앉아 멍 때리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이 산사가 더욱 멋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 이름들 덕분이다. 바위에 꽃이 핀다는 '화암',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는 '우화루'! 소박하기 그지없는 산사에서는 고풍스러움이 배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