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산지 승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려준 곳)인 소수서원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하나다. 서원에 들어서니 하늘을 찌를 듯한 울창한 적송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원 쪽으로 가지를 숙이고 있는 나무들은 마치 서원에 공경을 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솔숲은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돼라 하여 '학자수'라 불렀다.
서원 입구에 웬 당간지주가 있나 했더니 이곳은 원래 통일 신라시대에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었다고 한다.
죽계천의 수려한 산세에 섬세한 서원의 건축물이 함께 하니 더할 나위 없는 멋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연화산의 푸른 기운과 죽계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라는 '취한대'에서는 시인이 아니라도 절로 시구가 떠오를 것만 같다.
죽계천 옆 큰 바위에 '백운동 경(敬)'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죽계지에 보면 '경'은 구차함의 반대됨이니 잠깐만이라도 구차하면 이는 곧 불경이다.라는 뜻으로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직접 새긴 것이라고 한다.
서원은 조선시대 유림들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활동기반이었고 강학과 제향의 기능도 담당했다. 소수서원은 원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경렴정',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강학당',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문성공묘', 유생들이 유숙하던 직방재와 일신재 등으로 나뉘어있다.
영정각은 주자학의 시조인 주자의 영정과 우리나라 주자학의 선구자인 안향,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 한음 이덕형, 오리 이원익, 미수 허목의 영정이 있으나 복제본이고 진품은 소수박물관에 있다.
소수서원에 대한 해설을 한참 들을 때다.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고 우리는 서원의 툇마루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화려한 단청 아래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얼마나 경쾌하고 시원하던지 잠시 어릴 적 하굣길에 온 비 다 맞으며 일부러 개울 속을 첨벙이며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건물을 살펴보면 단청이 되어 있는 곳도 있고, 수수하게 남겨진 곳도 있는데 이는 주요 건물에만 단청을 했다고 한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원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를 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에서 빼놓지 말고 다녀와야 할 곳이 탁정지와 죽계다. 물이 흐르는 풍경은 팍팍한 우리의 마음에 때로는 감로수가 되어주기도 한다. 산책길은 걷기에도 좋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소수서원은 또 다른 멋을 자아낸다. 가는 도중에 넓은 연밭이 있는데 이제 막 연꽃도 피기 시작했다.
그리운 부석사 야간기행(세계유산 활용 프로그램)
부석사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7개의 사찰 중 하나로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한국 화엄 불교의 근본도량으로 세운 화엄종찰로 통일신라시대 화엄이 여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국보 5점을 비롯하여 보물과 지방문화재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산사'라는 말만 들어도 왠지 편안해진다. 게다가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떨어지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라도 하면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한껏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똘망똘망하게 빛나는 나 자신과 만나게 된다.
부처님의 성전에 다다르는 길을 결코 쉽지 않았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에 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석사의 문턱에 섰을 때 절의 웅장함에 마치 작은 왕국을 대하는 듯했다. 산세에 푹 파묻힌 20여 개의 법당이 서로 어깨를 마주한 모습은 우리 같은 일반인이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다.
법당은 최대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짓느라 약간씩 빗겨 세워졌고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범종각조차 정면이 아니다. 범종각은 조선시대 지어진 것으로 현판에 봉황산 부석사라고 적혀 있다.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라고 쓰여있어 부석사가 두 산맥이 만나는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세를 따라 세운 법당들 사이사이에는 석단을 만들어 하품 중품 상품으로 나누어 극락왕생을 꿈꾸는 사상을 사찰 건축에 녹여 놓았다. 유난히 계단이 많은 것도 의상대사가 화엄경 십지품에서 말한 수행 경지를 부석사 곳곳에 10군데의 돌계단을 쌓아 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범종루를 지나면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무량수전이 있다. '끝없는 목숨을 가진 곳, 즉 극락'이라 할 수 있다. 독특하게도 무량수전의 부처님은 정면이 아닌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방정토에 계신 부처님이 동쪽을 바라보며 중생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이 계시기에 흔히 좌우에서 보았던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도 없다. 중심이 되는 건물에는 대웅전과 같은 용어를 쓰는데 이곳을 무량수전이라 함은 예전에는 법문을 강론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부석사의 하이라이트이자 목조건축 기술의 정점이라고 평가받는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양식이다. 날아갈 것 같은 처마가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서려있다. 배흘림기둥은 허리 부분이 가장 굵고 위아래로 가늘어지는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는 멀리서 보았을 때 안쪽으로 굽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방지하여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석등이 50 센티미터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도 무량수전의 현판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곳곳에 사상과 철학이 녹아있다.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 그를 사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은 끝내 그녀를 거절했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 의상이 귀국하는 뱃길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는 큰 바윗돌이 되어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으니 그 바위돌이 부석사 뒤뜰에 있다. 지금도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한다고 하고 절 이름도 부석사가 되었다.
영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곳으로 성리학과 불교의 근본 도량으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어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다. 가슴이 뿌듯하다. 무엇보다 수려한 자연경관이 아름다웠고 우리 선조들의 멋과 여유와 사상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