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북천역 코스모스, 한산사, 동정호
추석을 보내다 보니 갑자기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운 황금물결이 보고 싶었다. 이른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긴 연휴 때문인지 차라는 차는 온통 쏟아져 나온 듯하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창 밖에는 익어가는 벼들로 온통 황금빛이다. 어디 그뿐이랴 산기슭의 감도, 지지대에 매달려 있는 사과도 그 붉은빛을 더하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에어컨을 켰었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에 옷깃으로 스며드는 바람이 꽤나 차다.
넓은 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내 마음이 이런데 농부들 마음은 어떠랴? 혹시라도 태풍이 올까, 가뭄이라도 들까 노심초사하며 키운 벼가 드디어 황금빛으로 변한 모습에 이제야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게다.
하동 평사리는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의 배경지로 한옥마을과 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앞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황금들판 한가운데의 부부송은 백미다.
이번에는 바로 옆의 천년고찰인 한산사에 올랐다. 중국의 악양에 고소성과 한산사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악양과 닮은 곳이 있어 악양이라 하고 절을 지으니 그 이름이 한산사다. 길고 높게 쌓은 축대가 인상적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하동의 절경은 그저 엄지 척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은 산으로 에워싸인 마을의 정겨운 모습과 굽이굽이 돌아가는 섬진강 물줄기의 어우러짐이 마치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된 듯하다.
들녘 한쪽에 있는 동정호 또한 중국 후난성의 호수 이름이요, 정자도 악양루라 하였다. 이 생태 습지는 두꺼비 산란장소로 보호를 받고 있는데 특히 금개구리가 발견되어 서식 중이라고 한다.
동정호에는 지금 아름다운 꽃잔치가 열렸다. 특히 아침 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분홍빛 핑크뮬리와 아직도 피어있는 붉은 상사화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동정호가 빛나고 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하동 북천역이다. 코스모스 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담고 싶었다. 현재 북천역 인근에는 코스모스 축제가 대규모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그 정겹던 철길에는 기차 대신 레일바이크가 달리고 있고 기찻길에는 높은 철창이 세워져 있다. 물론 무지 많은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있고 멋진 배모양의 구조물도 생겼지만 내 마음속에 있던 그 정겨운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아쉬운 마음은 코스모스길을 걷다 보니 차츰 사라지고 어느새인가 마치 내가 나비가 된 듯 꽃길을 따라 덩실덩실 걷고 있었다. 역 쪽에 마련된 터널에는 희귀하게 생긴 뱀 오이와 손바닥 높이의 해바라기까지 있고 개울에는 우렁이 있다.
황금빛의 벼부터 핑크뮬리와 코스모스 해바라기까지 종일 꽃을 보며 다닌 하동. 이제는 머릿속에 최참판댁의 한옥만이 아닌 꽃이 만발한 모습으로 아로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