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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Jun 18. 2024

이 집을 떠날 수는 있으려나?

금방이라도 아파트 주민을 모두 내보내고 바로 재건축에 들어갈 것처럼 떠들썩하더니 요즘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재건축 소식에 한 때는 잔뜩 들떴었다. 꼭 새 아파트에서 살고 싶었다기보다는 한 번쯤 다른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목동은 11단지 입주 때 처음 들어와 방 한 칸씩 늘리며 두세 번 옮기다 보니 어느새 40 년이 다 되어간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어딘가로 옮길 수는 있겠지만 이사 한 번 한다는 게 쉽지 않다.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고부터는 우리는 언제 집을 팔면 좋을까 하고 이만저만하게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니다. 새 아파트 입주까지는 적어도 10년은 걸린다는 데 노후에 아파트를 쪼개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는 무리다. 요즘은 집이란 것이 단순히 주거 목적만이 아니라 재산 증식의 중요한 수단이니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1985년 단칸방으로 시작해 2년 뒤 은행 빛을 얻어 겨우 독채 전셋집으로 이사 했다. 그 집으로 이사한 후 남편은 샤워만 하면 콧노래를 부르며 팬티바람으로 다녔다. 단칸방 시절에는 더운 여름 샤워 후에도 옷을 꼭 챙겨 입고 나와야만 했다.   

   

그 기쁨도 잠시 88 올림픽과 함께 치솟기 시작한 아파트 값은 처음 이사할 때는 집값과 전세금 차이가 500만 원이었으나 이사 나올 때는 5,000만 원이나 되었다. 그 후로 둘이 아무리 저축을 해도 집값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또다시 대출을 받아서야 집을 겨우 장만했고 그 후 10 년 동안 ‘방 한 칸 더!’를 외치며 집을 옮겨 다녔다. 힘들기는 했지만 우리 힘으로 집을 넓힐 때의 즐거움은 뭐라 표현할 수가 없다. 부모가 집까지 사주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때 방 한 칸 넓히며 느꼈던 우리의 즐거움을 알까?

      

목동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오래 산 곳이다. 처음 이사 할 때만 해도 여기저기 공터가 많았는데 하나둘 건물이 들어서면서 어느새 빌딩 숲이 되었다. 처음에 가로수로 심은 나무가 어찌나 가늘던지 안쓰럽게만 보이더니 어느새 아름드리가 되었다.  

  

식물원 못지않게 나무가 많아 봄이면 목련부터 개나리 진달래가 차례로 피기 시작해 벚꽃까지 만발하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여름이면 나뭇잎이 온통 하늘을 가려 굳이 양산이 필요 없다. 가을이면 바닥에 떨어진 은행 때문에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단풍나무 옆이나 은행나무 터널을 걷다보면 레드카펫이 부럽지 않다. 

 

   

오래된 아파트 건물은 몇 번이나 외벽을 칠했는데도 어느새 색이 바라고 거북이 등처럼 일어나는가 하면 길게 금이 간 곳도 있다. 겨울이면 여기저기에서 공사 소리가 끊이지 않는데, 수도관 동파에 노후된 난방 배관이 터지는 사고가 잇따른다. 그뿐인가? 안양천이 가깝고 나무가 많아 좋은 점도 있지만 여름이면 모기와 하루살이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하고, 지하 주차시설이 없어 밤늦은 시간에는 주차가 어렵다.     


우리는 탁 트인 전망을 좋아해 단지 가장자리에 있는 동의 12층에 산다. 건너편이 푸른 산이 아니고 고층 건물에 둘러싸이긴 했어도 안양천 물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것이  멋진 카페 부럽지 않다. 17 년 전 리모델링할 때 꿈꾸듯 아파트 구석구석을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고쳤다. 당시 유행하던 대로 벽장이며 베란다는 물론이고 화장실 욕조까지 털어냈더니 거실이 운동장만 하다. 삼사십 명 정도 손님이 와도 끄떡없다. 식탁은 당시 유행하던 아일랜드 식으로, 거실 벽면은 사각형 나무장으로, 거실과 부엌 사이에는 흙벽돌을 쌓았다. 

     

시간이 흘러 작년에는 도배도 다시 하고 등도 LED로 바꾸고 가전제품이나 소파도 새로 들여놨지만 왠지 우중충하다. 바꾸지 않은 싱크대와 장롱 때문일까?  하긴 몇 년 전부터 가구 문이 조금씩 비틀리더니 이제는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다. 성질 급한 나는 인덕션으로 요리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주방에는 아직도 구형 가스레인지를 쓰고 있다. 기껏 유럽 여행할 때 무겁게 사온 하이라이트는 아직도 싱크대 아래 고이 모셔져 있다.  

    

두 딸이 빠져나간 방은 우리 부부의 서재와 침실이 되었다.

"그 넓은 집에 너희 둘 만 사는 거니?" 

아니 이 집이 뭐가 넓다고..... 결혼도 안 한 딸을 내보내고 강아지만 껴안고 사는 우리가 못마땅한지 시부모님께서는 공연히 타박이시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한 달만 집에 있어도 갑갑해 어디론가 떠나지만 열흘만 지나도 이 손 때 묻은 집이 그리워 허겁지겁 돌아온다. 낡기는 해도 구석구석에 추억이 서려서 일까? 만화책이 가득한 큰 딸 방이나 아직도 어릴 때 사진이 걸려있는 작은 딸 방에서는 금방이라도 "엄마" 하며 딸들이 뛰쳐나올 것만 같다. 돌아가신 지 20 년이 지났지만 친정 엄마가 목침을 배고 모로 누워계시다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밥은 먹었니?" 하고 물어보실 것만 같다.    

  

이렇게나 소중한 나의 보금자리, 과연 떠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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