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공원, 하늘 공원, 문화비축기지
가을 낭만을 제대로 느끼려면 오색 단풍뿐만 아니라 바람 따라 흔들리는 은빛 억새가 최고다. 억새로 유명한 곳은 정선의 민둥산, 포천의 명성산 그리고 저 멀리 순천만 국가정원이 있다. 하지만 서울에서 지하철 타고 월드컵공원 역에 내리면 광활한 억새밭뿐만 아니라 강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부터 여의도의 쌍둥이 빌딩, 남산타워까지 서울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고 운 좋으면 건물 너머로 떨어지는 멋진 일몰까지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상암동의 하늘 공원이다.
많은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억새 축제가 끝난 뒤에 찾았다. 때가 때인지라 하늘 공원 주차장에는 자동차를 대기조차 힘들어 건너편 월드컵 공원 주차장으로 향했다. 가을 단장을 마친 주차장은 숨 막히는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단풍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월드컵 공원으로 향했다. 넓은 호수 근처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잠시 호숫가에서 물멍 하다 보니 작은 물고기부터 커다란 잉어까지 보였다. 전에도 물고기가 있었나??
멋진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는 월드컵 경기장을 보니 아직도 2002년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월드컵 경기를 주최한 덕분에 이곳 난지도 매립장은 새롭게 태어났다. 월드컵 공원, 하늘 공원, 노을공원, 평화의 공원, 난지천공원과 문화비축기지까지. 서울 서쪽의 랜드마크가 된 공원들은 오로지 시민들의 것이었다.
호수 한쪽에 있는 징검다리를 건너면 2013년 서울 정원박람회가 열렸던 곳이다. 그냥 풀밭이었을 공간이 정원사들의 아이디어로 조형물과 함께 새롭게 꾸며졌다. 오후의 달큼한 빛까지 함께한 숲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언제 와도 좋지만 특히 이 가을이 좋다. 오랫동안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다음 주부터 다시 추워진단다.
공원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쉽지 않아 휴게공간을 찾아 차 한잔 하며 쉬었다. 그곳에는 아이들과 함께 온 부부, 부모님을 모시고 온 젊은이, 동창들 모임인지 나이 지긋한 시니어들 그리고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월드컵 공원과 하늘 공원은 다리로 이어져 있고 하늘공원 정상까지는 291개나 되는 계단이 지그재그로 놓여있다. 꾀를 내어 맹꽁이 차를 타기로 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면 20 분이면 될 것을, 맹꽁이 차를 타기 위해 기다린 시간은 40분도 넘게 걸렸다. 쉴 새 없이 맹꽁이 차가 사람들을 나르고 있었지만 대기 줄은 좀처럼 줄지 않았고 계단 위에도, 맹꽁이 차가 다니는 넓은 길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말이면 하루 1만 명 이상이 찾는다더니 정말 사람들이 많다.
드디어 하늘공원 정상이다. 역시나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의 요염한 모습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바로 이 모습이 보고 싶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억새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지난해 설치한 조형물과 포토존도 조금씩 달라졌다. 인공적이기는 하나 꽤 근사한 인증숏이 나올 것 같다. 사부작사부작 억새밭을 걸으며 가을을 느끼고 싶었지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또 멋진 풍경을 담느라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느라 느긋할 수가 없었다.
곳곳에 마련된 전망대에는 아름다운 한강과 서울의 도심 풍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정말 이 아래에 쓰레기가 쌓여 있을까? 지저분했던 곳은 명소로 바뀌어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다.
축제 기간에는 이곳에서 음악 공연이나 조명쇼도 벌어졌겠지만 번잡한 행사가 없어도 억새 하나 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평일에 와서 한적하게 즐길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날씨가 흐려 일몰까지는 기대하기 어려운 데다 바람도 점차 세게 불어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주차장에 있는 차에 들어가자마자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었다. 다행이다 싶어 주차장을 빠져가려는데 바로 눈앞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떴다. 창밖의 사람들은 휴대폰을 치켜들고 무지개를 찍느라 정신이 없다. 얼마 만에 보는 무지개인지.
그때만 해도 우리의 탁월한 선택에 박수를 쳤다. 하지만 성산대교를 넘는 순간 그 까맣던 하늘에 있던 구름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지 해님이 우리를 약 올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참고 있다가 일몰까지 보고 왔어야 했다.
"매일 보는 일몰, 다음에 보면 되지. 아직까지 있었으면 비에 흠뻑 젖었을걸."
자동차 창문을 내려주며 남편이 위로해 준다.
단풍도 억새도 실컷 봤는데도 투정이다. 하지만 정말 구경 한 번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