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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굴업도

개머리 언덕, 코끼리 바위

by 마미의 세상

아침 볕에 반짝이는 강아지풀을 보고는 문득 '한국의 갈라파고스'라는 굴업도가 떠올랐다. 남미 에쿠아도르에 있는 갈라파고스는 외부와 단절된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 많은 야생동물이 사는 곳이다.


처음 굴업도에 갔을 때 개머리 언덕은 정말 장관이었다. 바다 사이로 길게 펼쳐진 언덕에는 수크령이 하얗게 일렁이고 있었고 키 작은 나무 아래에는 우리를 바라보는 사슴이 있었다. 녀석들은 도망가기는커녕 순한 눈망울로 낯선 이방인들을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떨어질 무렵 황금색으로 바뀌었던 수크령과 다음날 새벽, 어둠 속에 내린 서리 때문에 빛나던 모습은 또 얼마나 멋이 있던지. 그때의 기억은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고 정말 한국의 갈라파고스라고 할 만했다.




그동안 다시 찾지 않았던 것은 솔직히 숙박시설이 너무 빈약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밤이면 몇 번이나 화장실을 가야 하는데 어둠 속에서 외부에 있는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것이 꽤 불편했다. 그런데 우연히 다른 블로거들의 글을 보니 그동안 배편도 덕적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는 데다 깨끗한 펜션도 생겼다고 해서 다시 가보기로 했다.


인천 연안 여객터미널에서 해누리호를 타고 거의 세 시간 가까이 달려갔다. 짝수날이라 문갑도를 들른 다음 바로 굴업도로 향했다. 3만 원 가까이 된다던 요금은 3분의 1 가격으로 할인까지 해주어 횡재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선착장에서 멀리 떨어진 민가로 가려면 아직도 짐짝처럼 트럭 뒤에 올라타야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머리 언덕을 상상하며 잔뜩 부풀었다. 펜션에 내려 대충 점심을 먹고는 카메라 장비부터 챙겼다.

연평산과 덕물산으로 갈 수 있는 목기미 해변


개머리 언덕은 일몰이 멋진 곳이라 조금 기다려야 했으나 빨리 보고 싶어 일찌감치 언덕으로 향했다. 중간에 섬 주민을 만났다.

"요즘도 사슴이 많나요?"

"네, 많아요. 사슴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알아요?"

원 세상에! 사슴을 보러 온 사람에게 사슴 고기가 맛있다니.....

개머리 언덕으로 가는 입구


모래사장에 나있는 사슴 발자국을 볼 때부터 가슴은 더 뛰었다. 잠시 돌투성이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자 드디어 꿈에 그리던 초원이 나타났다.

너무 늦게 왔나 보다. 바람에 날아갔는지 줄기만 앙상하게 남은 수크령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슴이라도 보려고 이리저리 관목 사이를 찾아봤지만 그 많던 사슴은 또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 지를 않는다.

일출 보는 곳


고요한 초원에는 간간히 핀 억새만 보였고 마른 풀만 흔들리니 쓸쓸하기 그지없다.

'이게 아닌데. 펜션 사장은 올해는 꽃이 늦게 피어 11월에 더 멋있을 거라더니.......'

"사슴이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돌아보니 몇 마리의 사슴들이 풀을 뜯고 있다. 그나마 그 녀석들이라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혹시나 수크령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또 사슴 떼를 만나지는 않을까? 하며 빨리 걷다 보니 길다고 생각했던 능선길은 짧았다. 능선 끝에는 평일이어서 인지 두세 개의 텐트만 눈에 띄었다. 지금 사진을 보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는데 옛 모습만 떠올리며 투덜거리다 일몰도 보지 않은 채 내려왔다.



다음 날 일출은 해변에서 맞이했다. 물이 빠진 덕에 토끼섬까지 갈 수 있었다. 늘 물에 잠겨 있어서인지 드러난 섬은 이끼 투성이다.

바다 건너 보이는 봉우리 셋은 선단여
큰 마을 해변에서의 일출
토끼섬


다음 날 물이 빠져 찾아간 곳은 코끼리 바위가 있는 목기미 해변이다. 선착장에 내려 처음 본 곳으로 물이 들어오면 건너갈 수 없다. 모래사장의 양쪽 끝에는 연평산과 덕물산이 있는데 민가는 없는 것 같다.

머리와 긴 코 몸통까지 완벽하게 코끼리를 닮은 코끼리 바위


제법 가파른 모래 언덕은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모래가 쌓여 있어 오르기가 쉽지 않다. 능선 정상에 오르자 아름다운 해변과 초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꼭대기 어디쯤인가에 작은 호수도 있다는데 그곳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트레킹이 목적인 사람들이 두 산의 정상까지 오르려면 하룻밤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왠지 많이 변했다고 느껴졌던 것은 계절의 차이 때문이었일까? 깨끗한 펜션에 미니 버스까지 생긴 굴업도는 낯설기만 했다. 편하게 쉴 수는 있었지만 옛 정취는 사라졌다. 굴업도는 버스를 타고 편하게 들어가기보다는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가야 제 맛이고 허름한 민박집에서 밤을 보내야만 할 것 같다. 우리가 사슴을 많이 보지 못했던 것이 그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어딘가의 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것이었으면 좋으련만.....


돌아오는 배에서 눈을 감고 그전에 보았던 수크령의 일렁이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다면 그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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