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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비 내리는 세조길 그리고 법주사

by 마미의 세상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여유롭게 법주사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오늘은 남편 고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는 날로 부부가 같이 모이기로 했다. 처음이라 쭈뼛거리며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일일사진사로 자청한 나는 멋진 노송 앞에 그들을 세우고는 '치즈~'를 외쳤다. 다들 이미 반백 년을 훌쩍 넘겨서일까 아니면 멋진 풍경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일까? 인사를 나눈 후로는 서로 팔짱까지 끼며 남편은 나몰라 한 체 다들 숲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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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렇게 예쁘게 단풍이 들었을까? 빨갛다고만 생각했던 단풍은 맨 윗부분은 빨간색이었지만 아래로는 주황과 노란색이다. 오색 단풍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상큼한 숲내음, 발 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까지 우리는 연신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다 멋질 수 있을까?

"지난주 설악산에 갔더니 단풍이 제대로 안 들었더니 이게 웬일이래요!"

모임을 주선한 회장의 어깨가 한층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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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들어진 풍광을 보고 낙엽을 지그시 밟다가 공연히 가슴이 찡해온다. 마냥 푸르를 것 같던 이파리들이 붉게 타올라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는 떨어지고 있다. 나무처럼 다음 해 다시 피지도 못하는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아이 참, 둘이 정답게 포즈 좀 취해보라니까요."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니에요."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작은 시내에는 윗 풍경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다. 완만한 길은 보행약자도 걸을 수 있고 곳곳에 마련된 벤치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가끔 어깨 위를 스치며 떨어지는 낙엽은 우리에게 인사라도 건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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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길 너머에는 천 년의 절집인 법주사가 있다. 복천암까지 갔다가 오는 길에 들를까 한다. 갑자기 눈앞에 넓은 저수지가 나타났다. 이곳이 처음이 아닌데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며 발걸음이 느려진다. 가을 나무들이 감싼 잔잔한 물가에 반짝이는 윤슬은 또 얼마나 근사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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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길은 조선시대 세조가 병을 다스리기 위해 법주사로 향하던 길이다. 1.3 킬로미터의 왕이 걷던 길을 우리 가 걷고 있다. 세조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 밖을 나와 아름다운 풍경을 본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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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길 목욕소


세조의 기도처라고 전해지는 세심정에서 잠깐 쉬어가려 했지만 휴게소가 있는 세심정은 초만원이었다. 내친김에 복천암까지 다녀오자 해서 이 뭣고 다리를 건너 가파른 언덕에 오르니 아담한 절집이 나타났다.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나고 머물며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던 곳이다.


억불숭유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신미대사는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후에도 이 복천암에 머물며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고 한다. 그동안 세종과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긴박한 시간들이 지났다. 세조는 신미대사를 만나러 이곳에 왔었고 그의 영원한 스승이던 대사는 이곳에서 적멸하였다. 크지 않은 절집 앞에는 텃밭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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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로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정은 아직도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일부 사람들은 문장대나 천왕봉까지 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곳에서 돌아가는 것 같다. 산행을 한 후에는 막걸리 한 잔에 파전이 최고다.

오후 들어 바람이 세게 불어서일까? 갑자기 낙엽비가 쏟아졌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추는 모습이 애틋하고도 눈이 부셨다. 누군가는 낙엽비를 가을의 마지막 인사라고 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춤사위에서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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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수 쏟아지는 낙엽비를 사진으로 잡아보려 했으나.......


천년의 세월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단풍과 국화로 둘러싸인 법주사는 그저 한 폭의 그림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등재되었다. 금동미륵대불은 여전히 엄청나게 큰 데다 표정이 아주 근엄하다. 같은 불상인데 절마다 그 표정이 다른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지긋이 내려다보는 부처님을 보며 들뜬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다. 건축물로 알았던 팔상전은 탑이란다. 그렇다면 탑돌이는 어디에서 할까? 색 바랜 나뭇결에 지나간 시간이 배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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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의 내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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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대불과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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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자 석등을 바치고 있는 사자의 암수 구별은 입을 벌리고 입까지 바치고 있는 것이 암컷이란다. 힘이 모자라 입을 벌렸다나!


아침 햇살에 빛나던 단풍은 이제 황금빛으로 불타고 있다. 낙엽비 맞으며 걷는 세조길은 너무 좋았다. 이렇게 바람이 불다 보면 며칠 후에는 달려있는 나뭇잎도 별로 없겠다. 아름다운 세조길에서 옛 왕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보니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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