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플레이스, 니체와 단테를 담다

스포일러 가득

by 오요

넷플릭스 The Good Place 드라마를 좋아한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천국, 연옥, 지옥처럼

사후에 good place, medium place, bad place 가 존재하는 세상이다.


천국, 지옥, 연옥을 오가는 평범한 악인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소소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철학 이론들을 드라마 속 상황에 빗대어 배워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니, 이 드라마는 아예 대놓고 철학을 가르친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의 중심 주제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다.

이렇게 이해해보자. 이들이 사는 사후세계는 사실 우리의 현실세계이다.

드라마 속 사후세계가 수백 번 수천 번 재현(rebooting)되면서 평범한 악인들이 얼마나 똑같이 행동하고, 얼마나 다르게 행동하는지 우리는 지켜보게 된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본다.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며 어디서 누구와 어떤 태도와 기분으로 살았는가?

오늘과 같은 삶이 매일 똑같이 반복되어도 괜찮은가?

그래 그렇다면 지금껏 살았던 생이 당신이 죽은 후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반복된다고 가정해보자.

지금 당신의 인생이 그대로 재현되는 삶을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지옥인가 천국인가.


영화 사랑의 블랙홀 속의 주인공은 전체 인생이 아니라 단 하루가 반복되는 생을 산다.

불친절하고, 불평 가득하고, 혐오와 무시로 마음을 가득 채운 하루를 사는 주인공은 불행하다.

그런데 그런 날들이 똑같이 반복된다. 내가 그 하루를 다른 날로 바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참 뜻은 '이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니'라고 한다. 이제 달라질만하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살던 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오늘을 조금 더 나은 날로 만들어 볼 것인지. 시간여행을 하는 주인공은 어제로 되돌아가 그 하루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과 타인들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이후부터는 시간여행을 그만두기로 한다. 여러 번 다시 되돌아와 살았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것이다. 오늘 하루를 가장 빛나는 순간들로 채우는 것이다.


자, 이제 굿 플레이스의 평범한 악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자.

세월을 거듭하면서 발전과 퇴행을 거듭하는 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삶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서로'라는 것을. 그들은 함께했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했고 가장 발전된 버전의 자신과 서로를 만들어갔다. 혼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성장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은 생을 만들어 가려는 이들을 악마들은 가만두지 않는다.

악마들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 천재적인 전략을 쓴다.

괴물도 불구덩이도 아닌, 고립과 이간질.

이것이 바로 악마의 가장 성공적인 전략이다.

고립되고 이간질당한 이들은 스스로의 지옥에 갇힌다.


이 드라마는 과연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결국 천국, 연옥,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닌 바로 우리의 마음 상태를 일컫는다.

내가 누구와 있고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가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었고 똘똘 뭉쳐 함께 더 나은 인생을 만들어 낸 평범한 이들은 드디어 천국으로 들어서게 된다.


천국에는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갖춰져 있다. 결핍과 소멸이 부재하는 곳이다.

원하는 것은 언제든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러나 천국에 사는 이들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가 않는다. 모두들 좀비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스타더스트로 만든 밀크셰이크를 한 손에 들고 맛있게 먹으며 다가온 이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밀크셰이크랍니다."


결핍이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살아갈 의미와 동기를 잃어버린다.

삶의 의미가 없어지자 자기 자신도 결국 잃어버린다. 존재의 의미도 상실했다.

자기 정체성을 잃고 스스로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좀비들은 멍한 표정으로 '우주선을 줘', '콜라를 줘', '아니야 다 필요 없어.'를 반복한다.


'밀크셰이크'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먹는 것이 자신이 되어버리는 상태.

들어간 것을 내 것으로 소화해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배설하는 상태.

이렇게 자아를 상실한 공허한 이들이 천국에는 가득하다.


주인공들은 천국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해결할지 머리를 모은다.

그렇다 역시 함께. 그리고 답을 찾는다.

그들에게 끝, 죽음을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자, 여기에 집중해보세요.

천국에 오신 여러분들, 그동안 참 훌륭하게 잘 사셨습니다.

지금처럼 계속 이런 삶을 즐기셔도 됩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세요.

그런데요, 저희가 한 가지 선물을 더 준비했습니다.

바로 저 문이에요. 저 문을 통과하면 여러분은 소멸하게 됩니다.

즐길 만큼 다 즐기시고, 이제 이만하면 됐다 싶을 때 저 문을 통과해서 이곳을 떠나셔도 됩니다.

완전한 소멸이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물론 영원히 안 떠나셔도 되고요.

자 그럼 다들 마음껏 천국을 즐기세요.


삶에 유한성이 주어졌다.

순간 좀비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들은 매 순간을 의미 있게 살기 시작했다.

자기 계발을 시작하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더 많은 경험을 찾아 나선다.

원하는 곳으로 실컷 여행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음식도 마음껏 먹는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즐겁게 산다.

프로이트가 말했다. 유한한 것일수록 그것이 주는 기쁨은 크다고.

영원히 살 수 있으니 언제든 할 수 있다가 아니라, 끝이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로 변했다.

이제 매 순간이 소중해졌다.



언제 삶을 끝내도 괜찮을 것인가. 정답은 없다.

다만 자연스럽게 스스로 깨닫는다.

각자의 삶이 달랐던 것처럼, 끝도 모두가 다르다.

백핸드 슬라이스를 마스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배우고 싶었던 모든 것을 끝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다 했다. 더 바랄 것이 없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다.


영원회귀를 멈추는 순간이다.

삶은 끝났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열반. 열반이라고 해도 좋겠다.


지금 내 삶은 몇 번째 반복일까.

나는 이번 삶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성장할까.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면, 나는 지금을 후회없이 살고있는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나는 친절을 베풀고 있는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나는 살아가고 있는가.

이렇든 저렇든 백핸드 슬라이스를 마스터하는 길은 내게 묘연하기만 하다.


어려운 철학 이론들을 한껏 버무려놓은 이 드라마가 주는 메세지는 결국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끝이 있는 삶, 우리 함께 지금 이 순간을 후회없이.


제작자가 천재인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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