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때 호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말씀드리니
결혼을 해야지 뭔 공부냐며 호통을 치시고는
결국 떠나는 딸의 얼굴도 보기 싫어서 아침 일찍 외출을 해 버리셨다.
1년 후 돌아왔을 때 아빠는 암에 걸려서 마지막을 준비하고 계셨다.
어렵게 떠난 어학연수라 가족들이 나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모습은 무뚝뚝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분이었다.
아이를 낳기까지 40여 년을 나는 아빠를 그런 분으로 단정 짓고 살아왔다.
자식을 낳아 봐야 부모마음을 안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에 대한 안 좋았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좋았던 기억만 남아있어 마음을 더 아리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아빠에게도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 있었구나.
떠오르게 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내 아이가 그걸 깨닫게 해 주었다.
8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는 먹을 것이 귀했고
간식까지 챙겨 먹을 수 없는 시절로 기억한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실 때
가끔씩 손에는 생과자나 군고구마 같은 간식거리를 사 오셨다.
물론 아빠의 퇴근이 반가워서 일 수도 있겠지만
달달한 간식을 기다리는 마음도 컸다.
두근두근 발 동동 거리며 현관에서 기다리던 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어느 날
엄마가 아빠에게 한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집에도 간식이 있는데 왜 자꾸 사 오세요? 간식은 내가 챙길 테니 사 오지 마세요.”
아빠에게 침묵이 흘렀다.
그런 말은 한 엄마가 얄밉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넷을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는 계획되지 않은 지출을 원하지 안 았을 거라고 지금에 와서 추측해 본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아빠의 손에는 검은 비닐이나 종이봉투는 들려있지 않았다.
아빠의 간식을 기다리던 꼬맹이의 달콤하고 소소한 행복도 끝이 나 버렸다.
그 이후로 자상한 아빠의 모습은 더는 내 머릿속에는 없었고
엄하고 절약하는 아빠의 모습만이 내 기억에 남았다.
딸아이가 5살 때 일을 다시 시작했는데
육아와 일로 쌓인 힘들었던 일주일의 피로를 녹여줄 나만의 방법을 찾아냈다.
금요일 저녁에 먹는 치킨과 맥주 한잔이 나에게는 그렇게 힐링이 되는 시간이었다.
퇴근하기 전 주문해 둔 치킨을 픽업하고
미리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 한 캔을 타서
첫 모금을 벌컥벌컥 마시다 보면
그 시원한 맛과 바삭바삭한 후라이드 치킨과의 궁합은 일주일의 피로를 풀어주고도 남았다.
이런 게 행복이지 행복예찬론자가 되기도 한다.
이제는 안 하면 서운한 일이 되어버린
매주 금요일 퇴근 후 치킨 피자 햄버거 떡볶이가 번갈아 가며 내손에 들려있다.
어느 금요일에는 냉장고에 처리해야 할 음식들이 많아서
빈손으로 집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딸아이의 시선이 내 두 손에 머물더니 이내 실망하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엄마 오늘은 맛있는 거 없어? 오늘은 엄마가 뭘 사 올까 기대하는 게 행복하단 말이야.”
“어머나 그랬구나. 다음에는 엄마가 맛있는 거 사 올게. 오늘은 다른 거 먹자.”
아이도 어린 날의 나처럼
엄마가 금요일마다 두 손 가득 맛있는 음식을 들고 오는 게 작고 소소한 행복이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우리 가족에게는 금요일은 행복을 먹는 날이 되었다.
내 아이로 인해 어린 날의 나의 추억이 떠올랐고
나의 아빠도 무뚝뚝하지만 사랑을 표현할 줄 아시는 분이었다는 걸
돌아가시고 나서도 한참 후에야 깨닫는 못난 딸이었다.
40여 년 전 아빠가 내게 달콤한 행복을 주셨듯이
나도 내 아이에게 소소한 이 행복을 깨지 않을 거 같고
오래도록 아이의 기억 속에 행복한 금요일이 기억됐으면 한다.
오늘도 내손에는 치킨 피자가 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