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싶다는 마음과 기대는 언제나 사람을 실망하게 한다
엄마는 항상 말했다. 성격 좀 죽이고, 여자답게 조신하게 좀 하고 다니라고. 개인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다가 성차별적인 이야기라며 귀에 인이 박히게 잔소리를 늘어놓은 끝에 엄마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왠지 이번 여행에서는 착하고, 고분고분하고, 효도하는 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소원인가? 그럼 뭐 한번 해 드리지, 싶어서.
아니나 다를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공항 가면서부터 그 결심이 무너지고 있는 걸 발견하고 나는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엄마는 첫 해외여행에 들떴지만 나는 엄마와의 시간을 오롯이 즐길 힘이 부족했던 것 같다. 혹시나 틀어질까, 뭔가 잘못될까,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일어나지도 않은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의 굳은 표정을 보던 엄마는 '너는 자주 여행을 다녀서 그런지 처음 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동네처럼 돌아다닌다'라며 신기해했지만, 나는 속으로 언제든 비상 신호를 켜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 말마따나 나는 여행 초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뭐든 멋지게 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삼촌들이 말해준 '음료는 무료이니 계속 요청하라'라는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여행 조언을 따라 엄마는 화이트 와인을 주문하고 싶어 했는데, 내가 예약한 에어아시아 항공편은 기내식은 물론이고 물 한 병조차 카드로 구매해야 한다는 걸 이륙 후에야 알아차린 나는 머리 뒤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애써 모른척해야 했다. 물론 음료야 주문해서 먹으면 되지만 엄마는 추가로 돈을 지출한다고 사양했다. 결국 우리는 일반 기내식과 물을 주문했고, 나는 맛있는 척 먹으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항공권 예매할 때 한 번 더 살펴봤었다면.
골드코스트에 내려 미리 예약해 둔 렌터카를 빌렸고, 당당하게 오른쪽 운전석에 앉아 뉴질랜드에서 1년 동안 갈고닦은 반대 운전 솜씨를 뽐냈다.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할 때도 괜찮았는데, 방에 도착해 전기가 들어오지 않음에 당황해 리셉션에 전화를 걸었다. "룸 키가 꽂혀있는데도 전기가 안 들어오나요?" 단체로 룸을 사용하는 호스텔에나 묵어봤지, 개인 키를 꽂아야 하는 호텔에 묵었던 경험이 없어 또 한 번 얼굴이 빨개지는 걸 느꼈다. 나는 엄마 앞에서 자랑스러운 여행 베테랑이고 싶었는데, 아직도 경험이 부족한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다음, 해가 지기 전에 근처를 돌아볼 계획으로 가까운 스카이 포인트 전망대로 향했다. 77층에 올라서 탁 트인 골드코스트 전경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했지만, 여전히 여행 첫날부터 망쳤다는 생각에 잠식당해 괜히 엄마에게 툴툴거렸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예전 생각이 났다.
우리 가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감정을 드러내는 데 아주 취약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나름 엄청나게 노력하지만 그 방법은 사실 현명하지 못했다. 기쁜 마음도 서운한 마음도 다 가슴에 담아두고는 밖으로 표현하지 못해 답답해하고, 결과적으로 각자의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몇 년 전, 한동안 엄마와 멀어진 적이 있었다. 나는 성인이었지만 정신연령은 너무 어렸고, 엄마는 현명하게 대처하려 했지만 이제껏 살아온 그 방법으로는 대처가 쉽지 않았을 테다. 진퇴양난에 빠졌던 그때의 감정대립은 처음부터 오롯이 내 자존감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나는 방어기제를 써서 마치 잘못이 엄마에게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였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책감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서로 마주 앉아 마음을 털어놓으면 눈물이 나서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게 뻔했다. 엄마는 나에게 편지를 썼고 나는 엄마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다시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그 사이에 나는 디어마이프렌즈를 다시 보며 이 대사가 가슴에 와서 박히는 것을 느꼈고, 현실도피하려 파고든 인터넷 세상에서 이런 글을 접하고는 다시 한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고 나는 동생과 따로 나와 살게 됐고, 우리는 적당한 거리가 생기면서 관계를 회복해갔다. 음식 레시피 물어보기를 빙자한 안부전화라도 하게 되고, 동생과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엄마도 전화를 더 자주 걸면서 평소에는 안 했던 이야기들을 더 하게 됐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 한평생 물가에 내놓은 아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천년만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각자를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
툴툴거리던 오후의 나는, 지나간 그날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시 붙잡기로 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던 한적한 동네를 걸어보고 싶다는 엄마와 산책을 하면서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의 내가 받쳐주지 않는다면 실망만 따를 것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은 잘하려는 마음 없이, 실망할 것이라는 괜한 걱정 없이 즐기려는 마음을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 뒤, 우리는 맛있는 맥주와 함께 저녁을 먹고 골드코스트 바닷가 근처 마켓에 돌아다니며 신나는 관광객 놀이를 했다.
너무 힘이 들어갔던 나머지 한껏 기대하고 한껏 실망했던 낮 시간을 지나, 저녁에는 힘을 빼러 1층 수영장에 내려갔다. 엄마는 수영을 할 줄 몰라 물을 무서워했지만, 나름 기대를 했는지 수영복까지 챙겨 온 모양이었다. 우리도 수영장에 내려가자, 는 나의 제안에 '아이고 어떻게 가!' 하더니 금방 마음을 바꾼 듯 래시가드로 갈아입는 모습을 보여줬다. 새로운 환경은 또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한다. 엄마는 결국 첫째 날 잠수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날에는 내 손을 잡고 발장구를 치며 10m를 수영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