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후회스러운
골드코스트에서 케언즈로 이동! (하지 말걸)
우리가 묵었던 숙소에서는 밤마다 창문 너머 저 멀리에 무지개가 보였다. 우리는 발코니에서 머리를 말리며 저게 뭘까 궁금해했고, 떠나기 전날에야 구글맵을 켜고 거리상 있을 법한 곳을 눌렀다가 깜짝 놀랐다. 여기에 또 다른 스릴이 있다니! 어느 티비쇼에선가 나왔던,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뚫을 듯 솟아올랐다가 중력에 몸을 맡기는 놀이기구. 우리는 체크아웃 후 골드코스트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엄마 친구들에게 줄 기념품을 신중하게 고르고, 신나게 슬링샷을 타러 갔다. 엄마의 후기에 의하면 브리즈번 드림월드 롤러코스터보다 재밌었다고 (ㅋㅋ).
공항으로 떠나기 전 잠시 근처 국립공원이 있는 바닷가에 들러서 산책을 하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평소 양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엄마지만 이제껏 먹어본 피자/파스타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말한 건, 진짜 이탈리안들이 운영하는 가게여서였을까 아니면 솔솔 들어오는 바닷바람과 여유롭게 한 점심 식사가 즐거워서였을까.
투어 취소가 내 심리에 미치는 영향
케언즈 도착, 아니 골드코스트를 뜨기 전부터 낌새가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골드코스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바로 여행사에서 온 카톡이 울렸다. [ 내일 기상 상황 때문에 리프투어 취소될지도 모른다네요ㅠㅠ ] 희망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미리 저장해 둔 아이폰 날씨 앱에는 케언즈에 계속 비가 내린다는 소식뿐이었고, 진짜로 도착한 케언즈는 공항에서부터 비릿한 비의 맛이 났다.
한동안 MBTI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P/J가 번갈아 나오는 타입이었는데, 이번 기회로 P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J였다면 그것도 엄마를 모시고 오는 여행에 이렇게 대충 계획을 짜진 않았겠지. 1일 차는 어디 어디, 2일 차는 무엇 무엇, 이렇게 큰 얼개만 잡고 여행했던 지난날의 나는 백팩만 덜렁 멘 혼행족이었기에 중간에 계획이 틀어져도 큰 타격이 없었고 오히려 예상치 못한 전개를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야 했다. 사계절이 거의 비슷한 우리나라와 달리.. 호주는.. 각 지역마다 기후가 다르고.. 골드코스트의 아주 화창하고 건조한 날씨와 달리 케언즈는 1월이 우기라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을 찾기가 힘든 곳이었다.
비가 축축 내리고, 습도는 동남아 못지않았던 다음날 아침 여행사에서 최후통첩을 받았다. [ 리프투어 취소되었습니다.. ] 설마 스카이다이빙은 할 수 있겠지 하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비도 취소 문자도 오지 않아 희망에 차서 미션비치로 향하는 픽업버스를 탔지만, 각 숙소들을 거치며 예약한 모든 인원들을 태운 그때 운전석 무전기에서 치지직거리며 비보가 날아왔다. [ 오늘 미션비치 스카이다이빙 투어 취소입니다,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요 ] 우리는 태워진 순서의 정 반대로 다시 숙소 앞에 떨궈졌고, 터덜터덜 다시 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리프투어는 둘째 치고라도 스카이다이빙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골드코스트에서도 할 수 있었지만 리프투어 때문에 케언즈에 오는 김에 가장 아름답다는 미션비치에 예약해 둔 참이었다. 엄마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스카이다이빙이라는 걸 떠올리니, 리프 투어는 제쳐두고 골드코스트에서 계속 아름다운 날씨를 즐기며 스카이다이빙을 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쉬워하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좋지 않아, 대신 한국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양평 패러글라이딩 코스를 찾았다. 하지만 엄마는 크게 실망했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너무 빠듯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매 검사마다 T/F도 번갈아 나올지언정 호주에서의 나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F에 가까웠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투어가 취소된 건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케언즈 조사를 더 자세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빼고는) 하지만 나는 감정에 휘둘렸다. 심지어 뭔가가 잘못되면 툴툴거리는 아빠의 모습, 엄마가 싫어하는 그 모습이 보여서 나 자신이 싫었다. 완벽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맏딸의 입장에서 뭔가 삐거덕거리는 걸 보자니 나 자신에게 얼마나 짜증이 나는지, 입을 벌리면 험악한 말을 쏟아낼까 봐 마음을 비우기 위해 명상하듯 저 멀리 산 너머를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 엄마가 넌지시 하는 "아이고, 날씨만 화창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에도 피해망상을 일으켜 '내가 더 잘 알아봤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하고 나를 깎아내리기에 이르렀다.
사실 MBTI는 핑계다. 당시의 나는 몇 년간에 걸친 패배의식과 우울감에 젖어있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을 내 탓으로 돌려버리는 일이 잦았고, 심리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처할 방법을 몰랐다. 퇴사한 후 몇 년간 방황했고, 도망치듯 떠난 뉴질랜드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부딪혀야만 하는 걱정을 빙자한 온갖 잔소리들이 두렵기도 했다. 살갑지 않은 딸의 모습을 하고 여행을 망치고 있는 나, 내가 엄마였다면 나 같은 딸년이랑 같이 여행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국에 가자마자 제대로 된 정신과 진료와 심리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사람도 여행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적어도 노력은 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꿩 대신 닭이지만 즐거웠어요
리프투어가 취소된 케언즈 첫날은, 호주 원주민들이 살던 쿠란다 마을에 방문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호텔 리셉션을 통해 투어를 예약해보기는 또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순조롭게 일이 진행돼서 사람들이 괜히 여행사 끼고 편안하게 여행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은 약사에게 여행은 여행사에.. 100년 된 관광열차를 편도 2시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타고 싶어도 당일은 티켓이 없어서 못 타요(..) 우리는 열대우림 위를 지나가는 스카이레일 왕복 티켓을 끊었다. 1시간 반 정도 타고 올라가면서 중간중간 정차하는 역에서 내려 열대우림을 걷고 아찔한 뷰도 볼 수 있었다. 산책로를 걷기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비 오는 열대우림 사이를 함께 걸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이런 관광스팟이라도 없었으면 비 오는 케언즈에서 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아찔했지만 이내 열대우림을 촉촉이 적신 비 냄새가 마음을 다스려 주었다. 자그마한 마켓을 둘러보고, 열대우림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캥거루 고기 버거가 있어서, 호주까지 왔는데 먹어봐야지! 하고 도전했다가 엄마의 치킨버거를 뺏어 먹을 뻔했다. 캥거루 버거를 시키는 나를 야만적이라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엄마는 (ㅋㅋ) 결국 나의 새로운 도전을 신기해하는 것으로 마무리.
가기 전 케언즈를 검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마련된 인공비치 라군에서 찍은 사진을 올려놓은 걸 볼 수 있었다. 파아란 하늘 아래 더 파아란 물 색깔. 도심 가까이에, 아니 5분만 걸으면 케언즈 시내에 다다를 수 있는 곳에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이 있다는 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계속 리조트에서 밤마다 수영을 했고, 날씨가 좋지 않아 라군에서는 발만 담갔지만 흐린 날에도 나름의 운치가 있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리조트에서 즐기는 수영이 더 좋았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수영장에서 전세 낸 듯 발장구를 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매일매일 엄마의 수영실력이 늘도록 손잡아 줄 수 있다는 것. 비 오는 하늘 아래 수영하면서도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느냐던 엄마를 보며 웃는 것. 어두워지면 방으로 쏙 들어와 감자칩에 맥주, 혹은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쉴 수 있다는 것이.
이름과 취향을 되찾은 엄마
다음 날은 공항에서 숙소로 갈 때 가로질렀던 보태니컬 가든에서 또 한 번 짧은 산책을 하고, 아쿠아리움에 들렀다. 예약은 제가 했는데 왜 엄마 이름을 물어보시죠..? 영어로 발음하기는 까다로운 이름이라, 엄마는 앞 자를 떼어 Eun이라고만 대답했다.
갑자기, 부모들은 아이를 낳고 나면 이름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낳고 몇십 년간 엄마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말고 본인의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누구누구 엄마가 대부분이었고 어르신들은 아예 내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잦았다. 해외에서는 성은 남편 것을 따를지언정 이름은 평생 불린다. 엄마를 Mom/Mother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자식들을 본 적도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결혼을 해도 성과 이름을 유지한다. 하지만 불리지 않는 이름이 의미가 있을까?엄마 또래의 어른들 이름과 비교했을 때 촌스럽지도 않고 아름다운 뜻을 가진 이름인데, 나의 탄생과 동시에 그 아름다움이 잊힌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한테 누구 씨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골드코스트를 떠나던 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음식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엄마는 케언즈에서의 마지막 식사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두 근처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시원한 발코니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에서 엄마가 화이트 와인을 찾았던 걸 떠올리며 연어 요리에 곁들일 와인 메뉴를 탐색하다가, 처음 시작으로 더 달짝지근한 로제 와인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분홍빛이 가득히 담긴 호리호리한 병을 하나 주문했다. 케언즈에서는 렌트를 하지 않아 운전에 대한 부담이 없었으므로 엄마와 함께 청량한 와인잔으로 건배를 할 수 있었는데, 한 모금 마신 엄마가 예상외로 이 로제 와인을 너무 좋아해서 깜짝 놀랐다. 너무 달짝지근해서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사람은 역시 쉽게 알 수 없다는 게 사실이거나, 아니면 엄마가 이제껏 몰랐던 자신의 취향을 되찾았거나. 엄마는 뭔가 미드에 나오는 외국인들처럼 바닷가에서 선글라스 끼고 멋지게 식사를 해서 좋다는 말과 함께, 또 한 번 음식에 감탄하며 와인 한 병을 싹 비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똑같은 와인을 사려고 수도 없이 많은 마트에 들렀지만, 결국 똑같은 건 찾지 못한 채 다른 분홍빛 로제 와인을 집어왔고 그 아이는 합정동 우리 집까지 무사히 도착한 이후 동생까지 합세한 우리 세 명에게 잡아먹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