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공항에서 되돌아본 일주일
여행 마지막 날, 아쉬움을 뒤로하고 케언즈 공항으로 향했다. 현지통화를 가지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에 동전을 모조리 꺼내 면세점을 돌며 엄마가 가장 좋아했던 초콜릿 바를 잔뜩 샀다. 이제 비행기 타는 일에도 익숙해진 엄마는 공항에서의 대기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기 시작했다. 미리 넷플릭스로 다운로드해 간 킹덤을 보거나, 공항 와이파이를 이용해 밀린 카톡과 연락을 처리했다. 탑승시간이 조금 여유롭게 남아있던 그때, 깔끔한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이 접근해왔다. “안녕, 전 여기서 호주 여행 경험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있어요. 잠시 시간 내서 참여해 줄 수 있나요?” 마침 기다림에 지루했던 나는 설문에 응했고, 조사자는 약 15분간 우리 옆에 앉아 호주에서 어떤 곳들을 방문했는지, 그 경험이 어땠는지, 교통편은 어떻게 이용했으며 만족도는 어떤지 등등을 물어왔다. 제공된 브로슈어를 엄마와 함께 보고 한국어로 질문을 다시 들려주며,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골드코스트 도착부터 아쉬웠던 케언즈 여행에 대해서 대답해나갔다. 단순히 그냥 설문에 참여한 것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의 지난 6박 8일 여행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고, 설문에 참여해 줘서 고맙다며 우리에게 건넨 기념품용 북 클립은 겉에 인쇄된 아름다운 사진들로 엄마의 눈길을 확실히 잡아끌었다.
조사자는 설문에 응해줘서 고맙다고, 조심히 돌아가라며 다른 여행자를 찾아 나섰다. 설문 내용만을 엄마한테 통역해 들려주고 조사자와 나눈 스몰톡은 그냥 넘긴 채였는데, 엄마가 좀 전에 말한 거 이런 이런 내용이냐고 물었다. 엄마는 학창 시절에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고 들었고, 엄마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나는 엄마를 가르쳤던 선생님을 만나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촌들처럼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더 할 수 있었다면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사회생활, 결혼과 육아로 공부를 손에서 놓은 지 한참 된 엄마가 녹슬지 않은 실력으로 영어를 알아듣는 걸 보고 나는 감탄했다. 엄마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또 말했다.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대충은 알아듣지. 오기 전에 미드 보는데 귀가 좀 뚫리는 것 같더라? 말하는 건 잘 못해도 그 실력 어디 가겠냐고.” 하고는 깔깔 웃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영어공부 다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시0스쿨이나 0나두 같은 온라인 영어강의 수강을 시작해보겠냐고 묻자 또 손사래를 쳤지만.
인천으로 돌아올 때는 광저우를 거쳐서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했다. 에어아시아나 호주 국내선을 이용했을 때와는 달리 스크린도 있고 기내식과 음료가 제공된다구! 늦었지만 오랜 비행을 제대로 즐기고 홈 스윗 홈에 돌아오니 저녁이 훨씬 지난 때였다. 짐을 풀어내면서 갑자기 한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기뻐 우리는 밤이 늦은 것도 잊은 채 라면을 끓이고야 말았다.
엄마의 첫 뮤지컬 관람기
다음 날은 엄마가 이번 일정상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었다. 미리 동생이 구해다 준 뮤지컬 <잭 더 리퍼> 티켓을 이날에 맞춰 예약했고, 마침 운이 좋게도 엄마가 좋아하는 엄기준 배우가 무대에 서는 날이라 신이 나서 올림픽공원으로 향했다. 나는 뮤지컬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내내 심드렁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뭔가를 할 때도 크게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엄마는 이런 면에서 나와 약간 다르다. 뭔가에 제대로 감동하여 눈물 흘릴 줄 알고, 기쁘면 소리 내어 깔깔 웃을 줄 아는 사람이다. 뮤지컬을 처음 본 엄마는 신기한 무대장치에 놀라고, 기대했던 엄기준 배우의 등장에 흥분했으며, 예상치 못한 아이돌 출신 배우의 연기에도 감동받았다. 시작하기 전만 해도 “나는 뮤지컬 보는 게 처음이라 어떤 게 매너인지 모르겠다"라며 중간중간 넘버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이 치는 박수에 조심히 데시벨을 얹고, 괜히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을까 조용히 훌쩍이더니, 커튼콜이 시작되고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자 벌떡 일어나더니 아주 귀한 것을 대접하는 사람처럼 크게 박수를 보내면서 눈물을 닦아냈다.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50이 넘은 엄마의 새로운 경험으로 꽉 찬 일주일. 첫 해외여행, 첫 수영 강습, 첫 와인, 첫 뮤지컬 등등.. 첫 스카이다이빙과 첫 헬리콥터 투어 그리고 첫 그레이트배리어리프 투어까지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인생은 항상 마음처럼 쉽게 길을 터 주지 않는다.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 할머니를 보면서 세상에 할 수 있는 경험은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세상엔 엄마가 도전해보지 못한 것들과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지천인데, 이제껏 그랬듯 앞으로 또 일상에 그 자리를 내어주겠지. 나와 동생을 키우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맛을 알려주고, 흥미로운 곳에 데려가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줬던 것처럼 반백이 넘은 엄마에게도 그런 경험을 더 시켜줄 수 있으면 좋겠다.
호주 여행을 다녀오고 한국에 잠시 머무르면서 나는 정신과 진료와 심리치료를 통해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툭툭 던지는 말로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고 말하고 싶다). 어릴 땐 가족의 소중함과 중요성을 잘 몰랐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지금 내 곁에 남아있는 가족의 귀함을 알게 된 나는 그들의 절대적인 행복과 평화를, 그들과의 안정된 관계를 원한다는 것이 이젠 생생히 느껴진다. 지금 당장 남들 다 하듯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거나, 성공한 사회 구성원이 되어서 물질적으로 보탬이 되지는 못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이고 그들도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서로 부담 주지 않기에,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소위 말하는 효도를 하며 행복을 추구하고자 한다.
한국에 잠시 머물다가 영국으로 온 지금, 나는 아직도 엄마의 스카이다이빙 도전에 미련을 놓지 못했고.. 여기에 있는 동안 엄마를 한 번 초대해 유럽에서 제2차 스카이다이빙 여행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망할 Covid19)
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라 / 김지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 이슬아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 리세터 스하위테마커르
- 엄마와의 여행을 계획하며 읽었던 책들. 몇몇 글귀들이 가슴에 아릿하게 꽂혀 아직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