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ynergist Oct 09. 2018

미련과 집착

사람은 자신이 못 가진 것에 끌리게 되어있다고 했다

* 이 글은 18년 7월 31일 블로그에 먼저 작성되었습니다.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 5년간 피아노를 쳤다.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동네 작은 피아노 학원에서 오후 시간을 많이 보냈던 기억이 난다. 재미로 시작한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는지 부모님은 당시 거금을 들여 디지털피아노를 장만해 주셨고, 매일 오후 뚱땅거리고 연습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연습실이 다닥다닥 붙은 자그마한 학원을 어떤 이유에선가 그만두고, 같은 동네에 사는 피아노 선생님 댁에 다니면서 일대일 과외식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 댁에서는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습했는데, 집에서 가벼운 건반의 디지털피아노를 치다가 레슨을 받으러 가면 묵직한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 연습을 한참 해야만 했다. 어린이 명곡집이나 체르니 초반은 학원에서 떼서, 체르니 100부터 30 그리고 몇몇 소나타 계열 악보를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게 참 재미없었다. 레슨 초반에 내가 피아노 치는 걸 즐거워했던 이유는 내가 평소에 듣던 동요들을 직접 연주할 수 있어서였고, 집에 피아노가 생긴 이후부터는 엄마가 즐겨 듣던 가요 멜로디를 악보 없이 즉흥적으로 치는 것에 재미를 느꼈었다. 나는 귀로 치는 사람이었다. 악보를 보기보다는 귀로 듣고 외워서 치는 타입. 그러니 지루한 음들이 반복되는 손가락 연습을 열 번씩 한 후 어려운 피아노 이론들과 클래식들을 배워가는 게 흥미롭지 않았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물론 학원을 보내는 우리 부모님 입장에서는 이 아이가 혹시라도 피아노 영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피아노를 배운 게 아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니스트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10살이 되면서 재미가 없다며 피아노를 그만뒀다. 더 이상 피아노를 치면서 즐거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도 알았다고 존중해줬던 것 같다. 디지털피아노는 커버에 점점 먼지가 쌓이거나 그저 장식물을 올려두는 존재로 전락했고, 유년기 소녀들의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사촌동생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그 집으로 옮겨지게 됐다. 그 이후 나는 한동안 피아노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도 피아노가 자꾸 눈에 밟힌다. 중학교 때는 손가락이 짧아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다는 음악 선생님의 연주를 보고 안타까워했고,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예배시간에 피아노를 치는 친구를 부러워했고, 음악시간에는 조금 일찍 가서 피아노 건반을 여기저기 눌러보기도 했다. 대학교 때는 피아노가 있는 교양 강의실에서 심심풀이로 터키행진곡을 치는 친구를 보고 와- 했던 기억이 있고, 유튜브에서는 피아노 커버곡들을 찾아 들으며 감탄하고, tv에서 유희열 정재형 같은 사람들이 실없이 농담 따먹기를 하다가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프로페셔널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 띠용 한다. 이후에도 피아노만 보이면 발걸음을 멈추는 나. 어릴 땐 악장을 나눠 봄여름 가을 겨울을 표현한다는 컨셉도, 감정을 담아서 피아노를 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노래를 할 때 감정을 담는 것과 비슷하다. 어릴 땐 대중가요 가사를 이해할 만한 세상의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우는 이유도,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가사 중 많은 부분을 공감할 수 있고 내 이야기처럼 느낄 수도, 감동을 받아 눈물 흘릴 수도 있다. 성인이 된 지금에서야 피아노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재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내가 이제껏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일을 다시 해보자 싶었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20년 만에 다시 치려니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도레미파솔라시도 누르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이론은 둘째치고 악보를 보는 법도 거의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배워야 했다. 뭘 배우고 싶어요?라고 묻는 선생님께 피아노 이론 역사와 클래식을 공부해보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이 당황한 게 역력히 느껴졌다. 취미반으로 들어오는 성인들은 대부분 원하는 곡을 지정해서 연습하거나, 코드 반주 혹은 재즈 피아노를 배우는 게 대부분일 텐데 피아노 이론과 역사부터 시작하고 싶다니.. 나는 어린 마음에 재미가 없어 기본을 놓쳤던 그 지점부터 막연하게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다. 한 달간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고, 매일매일 출근하듯 학원에 가서 혼자 몇 시간씩 허리가 아프도록 연습을 했다. 물론 어릴 때 치던 체르니나 소나타에 비하면 정말 쉬운 곡들이었지만 틀리지 않고 치기가 너무 힘들어서 이런 나의 모습에 혼자 좌절하기도 했다. 이렇게 재능이 없을 거면 관심이라도 있지 말든가.


나는 지금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고 피아노를 치고 싶다. 이런 게 미련인가 보다. 만약 어릴 때 커리큘럼이 나의 재미를 보장하는 쪽이었다면 나는 계속 피아노를 치고 살았을까. 취미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요즘 계속 뭘 하고 싶은가를 생각하는데 떠오르는 건 노래와 춤, 피아노나 기타 등 음악에 관련된 것들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잊지 않기 위해 최근에 읽은 책 <하루의 취향>에서 형광펜 쳐 둔 글귀를 붙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의 기운이라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