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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Oct 09. 2018

사람의 기운이라는 것

원 안에 들어가 보면 나를 알 수 있다

* 이 글은 18년 7월 31일 블로그에 먼저 작성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경험을 찾아 떠나온 각국의 여행자들을 만난다. 갭 이어를 즐기는 20대 초반의 독일인, 프랑스인들이 대부분이지만 드물게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다. 조금씩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어서 정리해보고 싶었다.


흔히 세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대한 농담을 한다. 미국인은 너무(!) 활달하고 국가 프라이드가 높다, 독일인은 차갑고 잘 웃지 않는다, 스페인 사람들은 항상 밝고 신나 한다, 프랑스인은 약간 게으르고 식사를 중요시 여긴다든가 하는. 한 국가에 인구가 몇인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모든 사람이 매운 음식을 잘 먹는 건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이어트나 피부관리에 집착하진 않으니까. (내가 마주친 사람들이 물은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이 바로 이거였다)



선입견을 깼던 사람들

어딜 가나 아시아 친구들은 조용한 편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한/중/일 빼고는 알려진 것도 별로 없어서 고정관념도 대륙으로 묶이는 것 같다) 영어 사용이 익숙지 않아서일까? 우리나라 사람들만 해도, 문장을 만들 때 문법이 옳고 그른 것만을 머리에서 생각하느라 스피킹이 잘 안된다는 사람들이 많다. 언어도 그렇지만 아시아 문화 자체가 미친 듯이 사교적인 성향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키위 팩하우스의 최고 가십걸은 태국에서 온 아이였다. (우리는 팩하우스를 고등학교 같다고 했었다) 나는 어딜 가나 소문에 좀 느리고 관심도 없는 편인데, 거기서 모든 이야깃거리들은 그 아이를 통해서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들어왔다. 누가 누구에게 관심이 있는지, 쟤는 몇 살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에 살고, 우리 시즌은 언제쯤 끝날 거 같고.. 모르는 게 없었다. 누가 아시아권 애들 샤이하대? 할 정도로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고 떠들기도 좋아해서, 다른 아시아 출신 사람들도 쟤 특이하다고 할 정도였다. 가십에 발이 달렸다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미친 듯이 달려 제일 처음 도착하는 곳이 이 친구의 귀가 아닐까 할 정도로, 온갖 소문이 아우라처럼 온몸을 휘두르고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아보카도 농장에서 일할 때는, 유일하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땐 유럽권 언어들을 귀로 들어서는 구별할 수 없었다. 키가 크고, 말수가 적고 목소리도 조용한 편이어서 약간 차가운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기에 막연하게 독일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아침을 먹으러 키친에 가면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 따뜻한 음식을 해 먹고 있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그 누구보다 일도 열심히 하는 친구였기에 프랑스인이라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프랑스인임을 알고 나서부터는 생각이 변하는 걸 느꼈다. 서로 별로 친하지 않았는데도 고개 끄덕이며 먼저 인사하고 웃어주는 사람이 차가운 사람이라니!? 말수가 별로 없어서 활기가 좀 덜한 것뿐이지 정작 대화를 해 보니 따뜻한 사람이었다. 큰 키와 움직임 자체가 크고 당당해서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 있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기운이 있는 친구였다.



전형적인 기운의 사람들

키위 팩하우스에서 일할 땐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곤 했다. 동이 트기도 전이라 서리가 사각사각 밟히는 추운 아침에도 활기차 보이는 사람을 키친에서 만났다. 내가 시리얼을 씹으며 점심 샌드위치를 준비하는 동안 달걀을 풀고 팬을 데워 오믈렛을 만들어 아침으로 먹으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계속 싱글벙글하며 말을 걸었다. 손발뿐만 아니라 몸 자체가 좀 차가운 편인 나는 세 겹을 껴입고도 어깨를 웅크리고 있는데, 얇은 티셔츠 하나를 걸치고도 저렇게 신이 나는 발걸음을 하는 걸 보니 몸에서 막 열이 도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좀 따뜻한데?라고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네던 그날 아침은 한 주 중 가장 추운 날이었고, 나는 아침 공기에 머리가 얼었는지 농담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이 친구는 칠레에서 온 스패니시 스피커였다.


팩하우스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스패니시 스피커가 있었는데, 얘도 느낌이 비슷했다. 먼저 웃으며 말을 건네고 심심하면 큰 소리로 스패니시 노래를 부르고 항상 대화할 누군가를 찾는. 일을 하다 잠시 짬이 나서 도움이 필요한 팩킹라인들을 살피고 있으면 저 멀리서 나보고 오라고 손짓했다. 대화하자고. (ㅋㅋㅋ) 반대로 이런 친구도 있었다. 처음 만날 때는 이것저것 대화하기 마련인데, 간단하게 소개를 마치고는 금세 조용해지던 창백한 피부의 친구. 뭔가를 묻거나 부탁할 때는 아주 특이한 억양으로 정중한 표현을 썼고, 가끔 뭔가 재밌는 일이 생겨 깔깔 웃을 때만 활기가 생기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이 친구는 영국 요크에서 왔다.


차 배터리가 나갔을 때 나를 도와준 커플이 있었다. 평소에 인사 말고는 말도 별로 안 해본 친구들이었기에 기회 삼아 이야기라도 좀 해보자 싶어 저녁에 찾아갔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빼빼로를 주고는 내 차로 돌아왔다. 그다지 내가 좋아하는 과자도 아니지만 당장 퇴근 후 한인마트에 갈 순 없었으니 카운트다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찾은 것이다. 마음은 고마웠겠지만 생소한 스낵이다 보니 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페트롤쉐어를 하던, 같은 국가 출신 친구가 내 차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커플이 좀 전에 키친에서 네 이야기하더라. 쟤가 갑자기 저녁에 우리한테 오더니 고맙다고 이걸 주고 갔어! 너무 착하다, 이거 진짜 맛있어,라고 속사포처럼” .....그런 표정들이 전혀 아니었는데,라고 대답하자 “알잖아, 우리 독일인인 거. 우리는 그런 말 잘 못해.” 그런 말 잘 못하는 독일인 커플은 팩킹을 도와주러 옆 라인으로 다가가자 또 수줍게 그거 너무 맛있었다는 말을 건넸다.



닭과 달걀

출신 국가에 대한 정보를 지우고, 혹은 묻지 않은 채로, 혹은 궁금해하지도 않은 채로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충 짐작 가능할 때가 있다. 억양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태도에 출신 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이 투영되어 있던 적이 많았다.


그런데 잘 모르는 나라, 그래서 형성된 이미지 자체가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반대의 경험을 했다. 일하면서 나이 지긋한 흑인 분들을 꽤 많이 마주쳤다. 말수도 많고 호기심도 많다. 여기까지만 하면 미국인이거나 호주인일 확률이 높다. 근데 조심성과 배려까지 많아서, 아주 바쁠 때 말고 좀 한가해 보인다 싶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말을 건넨다. 하나같이 따뜻하게 웃을 줄 알고 정도 많다. 그러다 보니 피지는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구나,라고 머릿속에 카테고리화 되었다. 이제껏은 고정관념을 알고 개인을 마주했다면, 이 경우에는 개인들이 모여서 국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뻗는다. 같은 언어/역사/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닮아가면서 국가 인상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되지만, 세세히 살펴보면 각 개인들은 그런 특성들을 포함해 비슷한 듯 다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만나 판단하는 데 국가의 기운이 먼저 느껴질까, 개인의 기운이 먼저 느껴질까? 한국인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른 나라에서 길러져서 좀 덜 한국인 같은 사람도, 그 활달하다는 미국/호주인들 중에서도 떠드는 걸 덜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테다. 아주 조용하고 예의 바른 중국인, 다양한 감정들을 숨기고 사느라 무뚝뚝한 기운이 도는 라틴 계열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나는 어떤 기운을 가진 사람일까?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줄까? 나는 전형적인 한국인인가?

 


이런 기운을 가진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는 힘들어서, 남들이 건넸던 말들을 떠올려본다. 어디서나 약간 양극단의 특성을 다 가진 사람이다. 기본적으로는 조용하고 성실한 타입이라서, 처음엔 입 닥치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금 친해지면 모든 일에 개썅마이웨이라 평범의 범주에서 약간 벗어나는 걸 알게 된다. 예의는 갖추고 할 말 다 해가면서 공부 열심히 하는 또라이라 학교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쟤는 모범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항아도 아니야, 속을 알 수가 없다 라고 했었다. 대학교 때도 선배들한테는 예의는 갖추되 막 대하고, 후배들한테는 막 대하는 척 욕 섞어가며 존중해줬다. 평소엔 하는 짓이 좀 또라이인데 가끔 술자리에서는 어쭙잖게 진지한 이야기 하는 카테고리로 묶였다. 이제 생각해 보니 그래서 회사 다닐 때 많이 답답했나 보다. 뭔갈 말아먹을까 봐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고(가르쳐주지도 않았으면서) 또라이 짓거리를 못하고 다닌 게. 그나마 친했던 사람들은 내 특성을 알아채고 그만둔다는 결정을 존중해줬다.


나는 한국에서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니다. 매운 걸 좋아하긴 하지만 잘 못 먹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는 내가 편한 대로 하는 주의고, 남들이 다 하는 건 웬만하면 안 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외국에서는 전형적인 한국인인 것 같다. 그들에 비해서 매운 음식을 잘 먹고, 조금 성격이 급하다. 낯을 가리기 때문에 첫인상인 조용함과 성실함만을 보여줘서 더 한국인 같다. 결국에 이건 다 주변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내가 이렇게 집시처럼 캠퍼밴 여행을 하는 걸 보면서 좀 특이하다고, 쿨하다고, 비범하다고, 나도 그렇게 여행해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던 걸 보니 나는 남들과 똑같은 게 싫은 사람인 것 같다. 학창 시절 틀에 박힌 생활을 하는 게 답답했었는데, 성인이 되고 스스로 내 삶을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좋다. 팩하우스 페트롤 쉐어링 메이트가 이런 말로 대화를 시작한 적이 있다. “I know you don’t care-” 난 안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눈에도 마이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말이었다. 앞으로도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한 이런 기운을 내뿜으며 살고 싶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나를 만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유머러스하지 못해서 재미는 없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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