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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nergist Oct 09. 2018

두려움 없이 사랑을 시작하기

일단 나부터 먼저 사랑하고

* 이 글은 18년 7월 26일 블로그에 먼저 작성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잃는 것, 잊는 것이 두렵다는 글을 썼었다. 인간관계 전체에 대한 글이었지만 이번에는 사랑과 관계로 범위를 좁혀볼까 한다. 최근 노희경 작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가 재출간돼서 e-book으로 두 번이나 읽었다.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 건 부모와의 사랑에 대한 부분들이지만, 몇 년 전 많은 것을 깨달은 이후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패스. 집행유예를 바라며.



아, 부모님 이야기를 한 김에 이렇게 시작해야겠다. 부모님의 이혼은 1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가치관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어린 나이에 꽤나 충격을 받았지만 장녀로 동생까지 챙기느라 아닌 척하는 게 힘들었고, 당시에는 이혼이 좋은 이미지도 아니어서 부모님은 우리 남매에게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었다. 요즘에는 이혼이 큰 흠도 아닐뿐더러, 모두의 nn년을 불행하게 만드느니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딱 하나 아직까지도 흔들리지 않는 내 가치관 하나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이다. 이제까지 파악한 나 자신은 독립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 결혼이라는 법적인 구속장치를 언젠가는 깰 것이고, 혹여나 아이에게 내가 받은 상처를 대물림 해주고 싶지 않다. 물론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충분한 사랑을 주며 키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사회 분위기까지 더해져서 이제는 부모님도 나의 비혼 선언에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또 한편으로 파악한 나 자신은 변덕이 너무 심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연인을 만나다가 혹여나 생길 내 변덕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아예 원천 봉쇄하는 방법을 택했다. 연인관계를 만들지 않는 것.



하지만 나는 친구를 기다렸듯 사랑도 기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인관계가 아닌 사랑받는 느낌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근데 또 웃긴 건, 호감이 있던 사람들이었더라도 나에게 사랑을 주면 호감이 싹 사라져 버렸다는 거다. 그걸 듣고는 대학교 때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너 자존감이 너무 낮은데? 네가 사랑받을만한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싫어지는 거잖아.” 맞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나를 좋아할 정도면 별로인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도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로 마음을 돌리면, 영원하지 못할 사랑에 대해 ’ 그럴 줄 알았지, 언젠간 끝이 있다’며 시작하지도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이기적인 멍청이였다. 세상에 주는 것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영원히 끌고 갈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면 감사할 줄 모르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을 땐 그깟 연인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합리화했다.



이십 대 초반에는 낮은 자존감이 이렇게 상대의 호감도를 떨어뜨렸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애정을 갈구했다. 자존감이 낮으니, 누군가 나를 좋아해 준다는 걸(황송하게도 미천한 나를 좋아해 주시는 거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기가 막힘) 알게 되면 달콤한 말들에 쉽게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무장해제당한 후에는 밑바닥까지 다 내보이고 뒤돌아 후회했다. 다 알았으니 나를 떠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상처받기 싫어서 내가 먼저 떠나기 일쑤였고. 마음을 얇은 천으로 덮어 일시적으로 감각을 교란시켰지만, 천이 너무 얇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결국 나는 천을 벗겨내고 숨어 있던 외로움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래도 오래도록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생각지도 못할 때 인연이 다가오곤 했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싶다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할 여력도 없이 바쁠 때만 날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는 일할 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보다 라는 뻔뻔한 생각이 든다. (요즘 든 생각인데 자존감을 올리는 데는 나 자신을 뻔뻔하게 바라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연인관계를 한 번 시작해본 적이 있다.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예상에서 시작한 거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오래 두고 볼 사이라면 친구로라도 잃고 싶지 않아서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였는데 어찌어찌 관계가 시작됐고 지내다 보니 잘 맞아서 일 년 반 정도 만났다. 사랑을 하면서 세상을 많이 알게 된다고들 한다. 이 친구를 만나면서 나와 다른 특성들, 내가 관심 없었던 것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시야를 넓히는 경험을 했다. 꾸준히 사랑을 주는 동시에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애정결핍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또 내가 말썽을 부렸다. 너무 자주 볼 때는 내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어했고, 일정이 맞지 않아 잘 못 볼 때는 익숙함이 시들함을 초래한다며 서로 더 상처받기 전에 좋게 이별을 권했다. 최근 읽은 책에, 감정의 양 끝은 이어져 있어서 의존적인 성향이 강할수록 의존적이고 싶지 않아한다고 하더라. 독립적이다가도 의존적이고, 의존적이다가도 독립적인 성향이 화를 일으킨 것이다. 뉴질랜드에 오기 전에 심리상담도 받고 서로 대화를 한참 하다가, 결국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마음이 정리돼 헤어지기로 했다. 심리적으로 굉장히 건강하지 못한 관계였다. 내가 삶을 살아가며 열정을 바치던 원동력이 마침 몇 년간 공석이어서, 연인이 생기자마자 모든 관심을 쏟아 원동력 삼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때 상담해주시던 선생님이 그랬다. 왜 불확실한 미래(상처받을 것) 때문에 가장 확실한 것(나를 사랑해주는 연인)을 포기하려고 하냐고. 제 말이 그거네요. 평생 이렇게 살아가지고요. 염병할.



그런데 후에 생각해보니.. 헤어진 연인과 친구가 되는 게 가능한가? 혹은 그때 내가 잃기 두려웠던, 나를 좋아했던 그 사람들이 아직도 친구로 남아있는가?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한다지만 오히려 상처를 준 쪽은 나였고, 잃는 것이 두렵다면서 혼자 관계를 정리하며 전부를 잃었다. 결국 친구도 연인도 남은 게 없다. 이게 떠오른 순간 마음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은 친구까지 잃는 게 두려워 관계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건 변명이라고.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건 바보 같은 일이라고. 나는 이제껏 혼자도 괜찮았다. 연인이 있을 때에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만큼 독립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잃는 것, 혼자인 것에 대한 불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 불편할 정도로 사랑을 갈구하며 상대에게 의존하지 말고, 먼저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조차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그 어떤 남이 나를 사랑해줄까. 연인관계를 시작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히는 것에 대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서 사랑을 줄 만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면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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