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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레 Apr 14. 2020

세렝게티 초식남의 초상화

내가 그린 얼룩말 그림

서귀포 이중섭거리에 있는 ‘한라꽃방’은 사계절 내내 예쁜 꽃과 나무가 가득한 향기로운 곳이다. 이곳에선 그 꽃과 나무를 닮은 여섯 살 그린이와 세 살 난 그림이를 만날 수 있다. 단 기린이 없을 뿐. 이제 한 돌이 채 되지 않은 막내 공주님의 이름은 다행스럽게도 기린이가 아니라 그루다.

한라꽃방은 이 집 셋째 딸인 혜연이 운영하는 카페 메이비와 나란히 자리한 서귀포의 대표적인 꽃집이다. 최근에는 그린, 그림, 그루의 엄마이자 막내딸이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제주하면 이중섭 거리의 카페 메이비, 한라꽃방, 역대급 조카바보 혜연과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귀여운 조카들 그린, 그림, 그루가 생각난다.

내게도 조카가 있다. 다행히 기린이는 아니다. 기린을 좋아할 뿐. 언젠가 가족 카톡방에 사진이 날아들었다. 사진 속에는 현유가 그린 기린 그림을 들고 있었다. 풀을 뜯고 있는 기린의 얼룩무늬가 비뚤비뚤 한 걸 보니, 언젠가 색칠공부를 하면서 “나도 고모처럼 선 안에 예쁘게 칠하고 싶다”며 투정을 부렸던 게 생각났다.


육알못인 내가 함께 해보자고 권했고, 아이는 계속 선에서 벗어나 색칠하면서 짜증을 냈다. 간신히 아이 엄마가 다섯 살은 이것도 아주 잘하는 거라며 여섯 살이 되면 괜찮아진다고 달래서 상황은 급 진정되었다. 서른 되면 괜찮아진다는 드라마 속 드라마가 있었는데, 현실에서는 여섯 살만 되어도 괜찮아진다니 놀라웠지만 육알못이니까 침묵했다.

단톡방 사진 속 기린의 얼룩무늬는 여전히 비뚤비뚤했으나 여전히 다섯 살이니까 괜찮은 건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손녀가 그린 그림이므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폭풍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작 아이가 그린 기린 그림을 보고 무심히 바라보던 나는 라이온 킹의 심바만큼 귀여운 아프리카에 사는 근육질의 동물들, 그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살려보고 싶어졌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는 살아있는 동물들을 직접 보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인물화를 그릴 때도 모델의 겉모습을 뚫고 내면, 영혼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림을 그렸는데, 추상화가 대세를 이루던 20세기에 최고의 구상화가가 직접 보고 그린 동물들에게서는 특별한 생동감이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 하는 재능 모자란 자의 비뚤어진 마음이 꿈틀된다. 뭐 육아만 모르겠는가,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해도 책에서 밖에 보지 못한 프로이트의 그림 속 말은 마치 날아오를 듯 특별한 생동감이 가득했다.   

그렇다. 나의 최애 동물은 기린이지만, 차마 다섯 살 조카랑 경쟁할 수는 없어서(조만간 그려서 망신당할지도 모른다) 지브라에 도전했다. 근육질의 생동감은 이 세상에서 나의 몫이 아닌 것 같아 아름다운 줄무늬를 가진 지브라의 초상화를 그리기로 했다.


평소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과 동물의 세계를 즐겨보는 편인데, 지브라는 내가 좋아하는 기린과 함께 종종 등장한다. 사실 두 프로그램은 BBC나 내셔널지오그래픽 유튜브에서 자막판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자막판보다는 한국어 성우 내레이션 더빙판이 훨씬 더 근사하다. 다른 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특별하게 중후하고도 독특한 그 목소리는 영도력 가득한 동물의 왕국 최고지도자가 애정을 갖고 자신의 동물 친구들을 소개해주는 느낌이 충만하니까.


그분의 말에 따르면 지브라는 눈이 머리 옆에 있어 사방을 잘 살필 수 있고, 청각과 후각이 발달해서 서로 털을 다듬어 주며 한가로이 있다가도 적이 나타나면 곧장 알아채고 경계하는 편이지만 친구들과도 잘 어울린다고 한다. 특히, 누와 기린 같은 다른 초식동물들과 같은 장소에서 풀을 뜯지만 서로 좋아하는 풀이 달라서 사이좋게 지낸다고.


그렇다. 지브라는 초식동물이었다. 갈색 빛이 도는 얼룩말이 암컷이고 검고 흰 줄이 선명한 것이 수컷이라니까. 내가 그린 지브라는 초식남이다. 지브라의 줄무늬는 인간의 지문처럼 모두 조금씩 달라 얼룩말들은 줄무늬로 서로를 알아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세렝게티에 사는 초식남 지브라 A씨의 초상화다. 제대로 된 인물화도 못 그려봤는데, 지브라의 초상화라니 뭔가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색을 구별하는 우리 눈에는 숲에 숨은 얼룩말의 줄무늬가 초록의 풀과 달리 보이지만 색깔 분별이 안 되는 육식 동물들에게는 모여 있는 지브라 무늬가 거대한 하나의 동물처럼 보여 쉽게 덤비지 못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려운 동물의 왕국이자 동물의 세계이다.


라이온 킹에도 등장하는 동물들의 대이동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심바는 무작정 어디론가 달리던 무리의 공격으로 아버지를 잃는다. 물론 삼촌의 계략이 숨어있었지만. 실제로 동아프리카의 야생동물들은 6월 말이면 탄자니아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캐냐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으로 대이동을 시작한단다. 동물들의 여정은 8월 초 이들이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 도착하면 마무리된다. 우리의 심바도 그 여정 어딘가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고전적인 패션 패턴으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지브라의 초상화는 평면적이면서 동시에 입체적이었다. 강렬한 눈빛과 검고 흰 줄무늬는 뭔가 사로잡히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설픈 색이나 선을 용납되지 않는 강인함 때문에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블랙 계열과 화이트를 단독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보리 블랙은 상아를 태워서 만든 동물성 흑색 안료로 요즘은 동물의 뼈를 이용한다고 하는데, 약간의 푸른빛이 돌아 신비감을 준다. 유화물감에는 실버화이트, 징크화이트, 티타늄 화이트까지 주로 사용되는  가지 흰색이 있는데, 티타늄 화이트가 20세기  가장 최근에 공업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색으로 가장 밝은 백색을 낸다. 여러  선을 덮고 다시 닦아내곤 했다. 너무 부드러운 선은 유약해 보였고, 선명한 직선은 생동감이 없을  같았다.


맑으면서도 강인한 지브라 A씨의 눈빛 표현도 쉽지 않았다.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모딜리아니처럼 한동안 눈동자는 비워둔 채 희고 검은 선을 쌓아가기만 했다.


결국 마지막 단계에서 속눈썹과 눈동자를 손 봐야 했는데, 마치 마주 보고 오랫동안 이야기한 친구처럼 친근감이 들었을 무렵 세렁게티에 사는 지브라 A씨의 초상화가 완성되었다. 그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강민아. Zebra. 2020. Oil on canvas. 33.4x24.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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