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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레 Apr 21. 2020

언니들의 그림을 만나다

조지아 오키프의 꽃 ‘흰독말풀’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여성 노동자의 인권에서 출발한 역사적 층위는 내버려 두고라도 세계 남성의 날이 없는 걸 보면, 기념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중국인 남자친구를 둔 한 J언니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3.8 부녀절은 가장 중요한 기념일 중 하나로, 그날 하루만큼은 집안에서 여성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단다. 밥도, 설거지도, 청소도, 빨래도 다 남자가 한다는 것. 길에서 야유회를 가는 여성들의 무리도 쉽게 만날 수 있다니, 장미도 좋지만 여성의 날은 여성이 일하지 않는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원칙이 좋다. 평소에도 집안 일을 그닥 즐기지 않는 나는 여성의 날을 앞두고 여성화가의 그림을 모작하기 시작했다.


2014년 뉴욕 소더니 경매에서 Jimson Weed(White Flower No.1) 즉, 흰독말풀이라는 작품이 4,440만 5,000달러에 거래되었다. 여성화가 최고의 기록이다.


생존 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의 ‘예술가의 초상’이 9,030만 달러에 거래된 것과 비교해도 절반 수준인데, 지난해 제프 쿤스의 ‘래빗’ 장난기 넘치는 토끼 조각품이 9,107만 5,000달러를 기록해 호크니의 기록을 갈아치웠고, 소더비 경매 1위를 기록한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는 1억 1,070만 달러에 거래되었으니 여성화가들의 작품 거래가는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절반 이하에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예술가의 초상. 1972. 210 x 300 cm. 아크릴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만 하는가?’라고 미국 여성 예술가 그룹 게릴라걸스가 물었던 것이 1985년이다. 미국 최대 미술관인 매트로폴리탄미술관 근대 미술 파트에는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이 불가 5%도 되지 않지만, 누드화 모델의 85%는 여성이었다. H.W.잰슨의 <서양미술사>에 등장하는 여성 화가는 과연 몇 명일까? 단 16명. 3,000년 역사에 여성 예술인이 단 16명이 소개되고 있다.


예술인이 아니라도 여성이기에 이런 혹독한 현실에는 화가 난다. 그러면서 뭔가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인이 되고픈 나는 최근 기초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주말 미술 수업을 시작했다. 몇 해 전부터 해오던 평일 수업은 코로나19와 함께 중단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주말 수업에선 오키프, 호퍼, 반 고흐, 모네 등 화가들의 작품 중에 형태가 간단하고 인물이 없는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려보기로 했는데, 제안받은 화가 중에 “오키프는 누구지?”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여성 화가 10명의 이름을 나열해보자. 내가 아는 여성 화가는… 프리다 칼로, 카미유 클로델, 나혜석... 10명을 채우기는 어림없었다. 반면 남자 화가는  차고 넘쳤다. 잰슨의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16명뿐이니까 정규 교육 과정에서 여성이 등장할 여지도 낮을 수밖에. 미안했다. 그녀를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오키프는 미국의 여성화가였다, 1887년 생으로 아흔여덟까지 꼬박 한 세기를 살며 2,000여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뉴멕시코 고원과 사막을 포함한 자연을 확대한 그림을 주로 그린 화가로 유명 사진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스티글리츠와의 러브스토리로도 유명하다.

여성화가 가운데 최고의 작품 판매가를 기록했다고 평가받지만 정작 오키프는 자신이 화가이지 ‘여성화가’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23세 연상의 유명 사진작가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초상과 누드 사진을 찍어 전시했고 오키프는 크고 화려한 꽃을 즐겨 그렸는데, 겹겹이 펼쳐지는 꽃잎과 꽃술이 여성 성기의 상징이라고 비평가들은 떠들었다. 반면 오키프는 성적 표현은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다며 꽃 자체가 아닌 꽃이 무엇으로 불리는가에 대한 비평은 무시했다.


오키프는 “사람들은 왜 풍경화에서 사물들을 실물보다 작게 그리냐고 묻지 않으면서, 내게는 꽃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해 질문하는가”라고 되물었다.

어쩌면 그녀는 언니들의 그림을 만나다 라고 제목 붙인 나의 글에 자신의 등장을 꺼려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화가가 아닌 화가이고 싶은 바로 그것이 진짜 페미니즘이란 걸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키프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20세기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한 인간으로, 위대한 화가로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오키프는 여행 중에 뉴멕시코의 사막을 보고 그곳이 자신이 머물 곳임을 알았고 그곳에서 사막과 동물의 유골 등을 그리며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시력이 약해져 유화 작업이 어려워지자 연필 드로잉이나 수채화를, 마지막에는 점토로 도자기를 굽기도 했다.


오키프의 작품은 꽤 다양했는데, 나는 초보적인 학습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목적에 걸맞게 상대적으로 쉬운 꽃을 그리기로 했다. 몇몇 마음에 드는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난이도가 조금 더 있다는 흰독말풀을 그리기로 했다.


나팔꽃들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묘사한 작품인데 여성화가 최고가를 기록한 비싼 그림이라고 하니, 더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하는 이유는 이처럼 다양할지라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많은 이해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하다.


“아무도 꽃을 보지 않는다. 정말이다. 너무 작아서 알아보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고, 무언가를 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 조지아 오키프


Nobody sees a flower? really? it is so small it takes time? we haven’t time? and to see takes time, like to have a friend takes time. / Georgia O’Keeffe


몇 달째 나는 이 흰독말풀과의 친교를 이어가고 있다.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 내게 말을 건다. 난 조용히 그 말을 듣고, 더 닮은 색을 만들고, 크고 작은 다름을 이해하고 표현하려 애쓰고 있다.

더 닮은 초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관찰해야 한다. 들여다보고 비슷한지 실물에 가까이 가서 비교해보고 가장 닮은 색을 만들어야 한다. 모사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


매주 토요일이면 만나고 있는  내 소중한 친구 ‘흰독말풀’을 소개한다. 아직 완성까지는 한 달은 더 걸릴 것 같다. 보통 매주 2시간 정도 진행하는 유화 작품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도 소요된다. 세밀한 묘사가 많은 경우 더 길어진다. 흰독말풀 이 작품은 심플한 편에 속하니까 꽃이 피는 여름이 오기 전에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미술에서 오키프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지만 뉴욕에서 조차 그녀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단 두 작품이 있다는데 실제 그녀가 남긴 작품은 2,000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산타페에는, 그렇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 이름 산타페. 뉴멕시코에 있는 그곳에는(그 차 아니고) 여성화가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딴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있다. 그녀가 인생 후반을 보낸 그곳에. 1997년에 개관한 미술관에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다. 아쉬운 나 같은 사람들은 구글 아트 뮤지엄을 통해서도 이 곳에 전시된 그림들을 만날 수는 있다.

강민아. 흰독말풀2. 2020. Oil on cavas. 53.0X45.5cm

2020년 5월 완성된 이 작품은 우리집 거실 한 켠에서 환한 분위기를 담당하다가, 2022년 여름 한 병원의 영상의학실과장님 방으로 옮겨갔다. 그 방의 주인공은 내가 대학 신입생 시절, 당시 의대 졸업반이던 M언니. 그녀는 지금도 힘들고 지칠 때 힘을 주는 멋진사람이다.


오키프라는 멋진 언니의 그림이 환자들을 진료하는 M언니의 일상을 지켜주리라 믿는다. 이거 마치 멋진 언니들의 만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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