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아홉수를 이야기하곤 했다. 스물아홉.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를 두려운 마음으로 읽어가던 20대 시절에 상상할 수 있었던 나이는 딱 그만큼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스물아홉에도 떨고 있는 내게 누구라도 크게 방황을 한다고 일러주었던 서른아홉도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마흔.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다는 소녀도 있었고, 내가 청소년 시절 집착했던 천재 예술가들은 삼십 대 초반에 대부분 생을 마감했다. 대학시절 내 철학 선생님은 마흔을 앞두고 자살을 준비했던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래, 나 역시 상상해보지 못했다. 마흔이라니. 40대 이후의 생은 미처 준비하지 못했는데 도둑처럼 중년이 찾아왔다.
마흔이 된 봄. 나는 결혼을 했다. 딱히 비혼을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도 없었거니와 젊은 시절 결혼해 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는 언니들의 일상은 힘겨워 보였고, 직장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남자 동료들의 삶 역시 팍팍해 보였다.
기혼자 중에서 결혼을 권하는 사람은 부모님 밖에 없다는 B급 유머에도 동감하는 바였다. 자녀의 독립이라는 본인의 과업 달성을 원하는 부모가 아니라면 3포를 넘어 6포도 해야 한다는 시대에 무슨 결혼이겠는가. 더군다나 나는 여전히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지방살이가 변화의 이유라면 가장 큰 이유인데, 10년도 더 다녔고 정년은 그 두배쯤 남은 회사가 경상남도 한쪽 끝 바다 도시로 이주했다. 퇴근 후 친구들과의 수다를 겸한 술자리와 주말이면 벌어지는 다채로운 모임과 취미활동이 생활의 주축이었는데, 급작스러운 이주에 일상은 제대로 망가졌다.
공장에 의한, 공장을 위한, 공장의 인간관계와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버렸고, 그 이야기를 나눌 대상도 직장 동료들 말고는 없었다. 이미 20대 초반에 떠난 고향이 인접해 있었지만 중고교 시절 친구들은 워킹맘으로 만날 수조차 없었다. 간혹 시간을 낸다 한들 차라리 공장 이야기가 낫겠다 싶을 만큼 20년 가까운 시간이 만든 괴리감이 컸다.
공장스러운 일상이 이어지면서 힘들어하던 나는 예전보다 제주도를 더 자주 찾아 걷곤 했다. 이러다 완주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즈음 주로 걷던 서귀포권 코스가 아닌 빠트린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 채 끝나기 전 어느 주말 나는 제주올레 2코스 성산포 성당에서 앞서 길을 걷던 한 남자를 만났고 나란히 걷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동네 오빠였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스무 살 무렵까지 지하철역 한 코스 거리에 살았었다. 초, 중, 고등학교 모두 인근 학교를 다녔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절친은 내 초등학교 선배이거나 그의 옆집 친구의 여동생은 내 중학교 동창이었다.
우리는 휴일이면 함께 산책과 등산을 하고, 수다도 떨면서 가까워졌고, 함께 하고 싶어 졌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함께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생활 동반자는커녕 스몰웨딩도 어려웠다.
이미 40대를 시작한 남녀가 부모의 지원 없이 자립형 결혼을 하기에도 수많은 협의와 조절이 필요했다. 특히 결혼식은 안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엄마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결혼식을 둘러싸고 모녀전쟁이 벌어졌다.
호텔이나 웨딩홀이 아닌 회사 강당에서 조용히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내가 졌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데, 엄마를 이기는 딸은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수치를 알고 싶다. 엉터리 통계일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의 대부분의 딸들은 엄마에게 진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은 대단한 자식들의 부모이거나 이미 이겨버린 부모님들이 만들어낸 반어적 표현이 아닐까.
결국 서울에서도 멀고, 유동인구가 작은 경남의 한 혁신도시에 있는 만큼 조용히 치를 수 있을 것 같아 결혼식 장소로 낙점된 회사 강당은 한 두 차례 이벤트적인 결혼식이 치러졌을 뿐이라 시스템은 부재했고, 대부분 직접 준비해야 했다.
예식 순서를 정하고, 단계별 음악을 선곡하고, 음악 파일을 다운로드하고, 현장의 오디오 기사를 섭외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결혼식 전에 사용할 영상 세팅과 웨딩 테이블을 만드는 것도 직접 해야 했는데, 그 웨딩 테이블에 갓 완성한 그림을 올렸다. ‘두 사람.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가 액자도 없이 캔버스 채로 올려진 덕분에 내 결혼식 웨딩 테이블은 이 작품의 전시장이 되었다.
결혼식을 둘러싸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회사에 손꼽히게 나이 많은 노처녀가 결혼을 한다니 다들 놀란 것은 물론이고, 사장님은 마침 회사 강당에서 하는 결혼식 일정과 미국 출장이 겹쳐 주례를 서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셨다. 감사님도 나서서 주례는 내가 서마 사전 고지하셨으나 고지식한 경상도 어른이라 신랑 측에서 주례 선생님을 모셨다는 말에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고는 물러서 주셨다.
요즘은 주례 없는 결혼식도 많이들 한다지만, 우리의 만남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상징적인 분으로 주례는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으로 모셨다. 제주도에서 만난 우리의 인연도 그렇거니와 나는 제주올레가 움틀 무렵부터 자원봉사를 해오고 있었다. 우린 언젠가 제주도에 가서 살 생각을 했고, 그 만남의 시작부터 제주와 연결되어 있었으니 결혼식 주례는 당연히 제주와 인연이 깊은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뒤 1년이 좀 더 지나고, 우리는 1년 동안 제주살이를 했다. 둘 다 16년 남짓 다닌 회사를 휴직하고, 퇴사하고 제주에서 걷고, 일하고 쉬며 지냈다. 제주 이민이 한풀 꺾인 시점이긴 했지만 제주살이는 오래된 바람이라 겁 없이 떠났다.
그리고 1년이 지나 육지로 되돌아왔다. 제주는 여행할 때 가장 좋은 곳이라는 커다란 교훈을 얻고. 다시 육지로 온 우리는 복직하고, 이직해서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때로 제주를 그리워하며 여행할 날을 기다리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