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마레 Nov 11. 2021

식물집사의 초상화

오징어게임도 달고나도 아닙니다

최근 오징어게임이라는 네플릭스 콘텐츠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주변에서 그림을 본 사람들은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이 입은 초록색 체육복인 줄 알았다는 둥,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는데 몇 번 참가자냐는 둥, 바나나 우유 모양의 달고나를 든 것 같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지만 모두 오해다.


몇 해 전 서귀포에 살 때 친구가 찾아왔다. 십 년도 더 전에 내가 이 친구를 만나러 베이징에 갔던 것처럼. 제주 곳곳을 관광객 인양 함께 이곳 저곳을 다니다가 바나나맛 우유를 만드는 회사가 운영하는 카페 겸 캐릭터 샵에 들렀고, 굿즈를 손에 든 친구의 표정이 재미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자꾸 쳐다보지 마세요”라는 메시지에 걸맞은 재미있는 표정이 포착! 당시엔 그냥 웃어넘겼는데, 작은 사이즈의 인물화를 그려봐야지 하는 생각에 소재를 찾다가 그림까지 그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에 이 친구가 종종 이런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특유의 표정을 그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몇몇 인물화나 강아지, 고양이 같은 동물화를 그려본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스케치북에 별도의 스케치 없이 캔버스에 바로 색연필로 샤사삭 스케치를 했다. 정교하게 세밀한 스타일의 그림을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미술수업이 또다시 중단된 탓에 혼자 밑칠을 끝내고 세부 묘사도 한 바퀴를 마친 상태의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은 드로잉이 늘었다고 칭찬해주셨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선생님들의 칭찬은 정말… 격려뿐일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드로잉이 조금은 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그림이 내게 준 숙제는 드로잉이 아니었다. 형태가 잡히지 않았다면 물론 형태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렸겠지만, 이번엔 색이 더 어려웠다.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의 유니폼 색과도 닮은 이 청록색 티셔츠. 계속 초록에 가까운 형태의 색만 만들어져서 고심하다가 화방에 들렀을 때 물감들 중에서 유사한 색을 좀 찾아봤더니 프랑스산 물감인 르프랑 별 6시리즈로 COBALT TURQUOISE LIGHT라는 색이 절묘해 보였지만, 40ml 기준으로 6만원에  육박했다.

유화물감은 천연안료나 합성안료 등을 주재료로 하기 때문에 안료에 따라 물감의 가격이 그룹화되어있다. 보통 1~6시리즈로 나뉘는데 가격도 단계적으로 비싸다. 높은 단계의 시리즈보다는 활용성이 높은 1~2단계의 물감으로 조색을 할 수도 있다.


르프랑 6시리즈는 가격이 후덜덜하기도 해서, 다른 수입 물감 브랜드의 1~2단계의 물감을 조색도 고민했다. 하지만 비슷하면서도 발색이 상대적으로 르프랑에 미치지 못할 비슷한 국산 물감을 쓰고 싶지도 않아서… 물론 내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감은 국산 제품이다. 하지만 발색이 중요한 몇몇 컬러, 이를테면 카드늄 레드나 엘로우, 옥시드 레드 같은 색은 해외 제품을 사용하기도 한다.

쨍하게 발색이 좋은 컬러를 보면 실력이 부족한 초심자는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걸 사서 칠하면 내 실력보다 그림이 좋아지는 게 아닐까 하고서 장비병이 도진다. 하지만 이번엔 색을 만들어 보기로 하고, 6시리즈의 물감 이름을 기준으로 추측해가며 코발트와 페이먼트 그린을 조금씩 혼합해서 색을 거듭 만들어보았다.


다행히 비슷한 색이 나왔다. 아마도 좀 덜 비슷하다면 그건 물감보다는 내 조색 실력 탓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서의 반전은 사진을 프린트한 인쇄물을 기준으로 색을 만들어 거의 비슷하다 싶을 만큼 색 유사성을 높였는데, 사진 원본을 봤더니 더 쨍한 초록에 더 가까웠다는 사실이랄까. 세상에 쉬운 게 없다. 문득, 앞으로는 기준이 되는 그림과 색 차이를 낼 수 있는 프린트물보다는 아이패드를 사용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초록초록한 셔츠를 입고 있는 초상화 주인공인 친구는 초록초록이 꽤 어울리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집에서도 식물들을 많이 키우고 있는 식물집사이기도 하다.

가까운 사람들의 인물화는 내가 닿을 혹은 닿지 못할 완성도 때문에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의 즐거움도 있다.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과 그날 사진 속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르면서 즐거웠던 기억으로 순간 이동도 할 수 있으니까.

강민아. 내 친구는 식물집사. 2021. oil on canvas. 24.0×19.0cm
매거진의 이전글 아프리카 냥이 수푸의 초상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