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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레 Dec 19. 2021

‘어쩌다 그림’을 그려요?

저녁이 있는 심심한 삶에 관하여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묻는 이들이 있다. 코로나19가 부른 단절된 일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수업을 통해 드로잉이나 여행스케치를 배운다고들 하는데, 난 조금 더 빨리 시작된 ‘저녁이 있는 심심한 삶’ 덕분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2014년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본격화되면서, 대학 졸업 이후 17년 만에 서울을 떠나 회사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삶, 완전히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당시엔 온라인 서점의 당일 배송은 서울에 국한되었고, 넷플릭스는커녕 지역 극장에는 인기 위주의 영화만 상영되어서 그러니까 내 취향의 영화는 보기 어려웠다.


퇴근 후에도 약속이 많고 뭔가를 배우길 즐기던 나는 이 새로운 생활에 답답한 마음이 컸다. 연말 모임으로 서울에서 만난 선후배와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던 중에 정치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 H가 말했다. “캘리그래피 같은 거 배워서 연하장 좀 써줘” 바쁜 자신은 배울 시간도 없으니 시간 많은 네가 재능을 키워서 기부하란 신박한 이야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검색을 했는데, 내가 생활하는 혁신도시 안에 그것도 회사 근거리에 떡하니 캘리그래피 공방이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곳에서 매주 한차례 2시간씩 일 년 남짓 가로세로선을 시작으로 다양한 글씨 쓰기 연습을 했다. 다소 웃프게 재능기부를 위한 강요형 취미생활로 시작되었지만 묵향이 번지던 저녁은 꽤 매력적이었고, 늘 논쟁적인 책만 즐겨 읽던 나는 이 무렵 다시 시를 읽기 시작했고 덕분에 마음도 조금은 말랑말랑해졌다.


때때로 수업을 통해 캘리그래피를 활용한 소품을 만들기도 했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새러 티즈데일의 <연금술>의 한 부분을 써서 만든 머그컵이다. 봄처럼 나도 내 마음을 들어 건배도, 차를 마실 수 있는 특별함을 선사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멋진 글씨 외에 글과 연관된 작은 그림을 함께 그려보고 싶었다. 화선지보다는 엽서 사이즈 수채화 종이에 좋아하는 인물과 메시지를, 영화 속 어떤 상징적인 이미지와 글을 표현하는… 그러니까 좀 더 재미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작은 엽서에 마음에 드는 문구를 붓펜으로 쓰고 연필이나 펜으로 인물이나 소품 스케치를, 때로는 색연필이나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렸다. 소재를 찾는 일도, 실제로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일도 즐거웠다.

초등학교 시절 몇 년 동안 학원을 다니며 익혔던 서예와는 달리, 캘리그래피는 자신의 개성이 담긴 글씨인 만큼 정답이 없다. 내 글씨 스타일과 어울리는 작은 이미지들을 그려 어떤 조합,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일은 흥미로웠다.


그러다가 문득 학창 시절 정규 교육과정에서 말고는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그림을 잘 그려보고 싶어졌다. 난 미술시간이 꽤나 괴로웠던 학생이었다.


문학과 사회과학책만 보던 나는 이때부터 미술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인생사는 물론 드로잉 기법이 담긴 책까지 두루 읽어갔다. 서점에 가면 주로 예술, 미술, 미술사, 미술실기 분야에 머물렀다.

화가들의 유튜브를 구독하기도 하고 유료 특강을 듣기도 했다. 주중에는 회사 앞 공공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 등록해 유화를 그리고, 주말엔 소규모 미술수업에도 참여했다.


퇴근하고 수업이 없는 날 저녁엔 심심함을 딛고 나 홀로 그림을 그렸다. 홀로 그린 그림을 선생님들에게 보이고 다시 배우고, 또 그린다. 방역상황 때문에 수업이 멈추면 또다시 홀로 그림을 그려야 했는데, 그 과정이 꽤나 더디고, 때론 답이 없어 답답하지만 또 그린다.


그렇게 그린 유화 그림을, 그 과정을 이 브런치 ‘그림 산책’에 소개해왔다. 일 년 동안 10개의 유화 작품을 브런칭 올리는 계획을 2년째 실현하고 있다. 작년에는 10개, 올해는 9개, 그리고 캘리그래피와 소품 같은 엽서들을 소개하는 이글까지 총 10개의 글을 업로드할 수 있을 것 같다.


올해의 열번째 브런치 글이자 마지막 유화는 파주의 예쁜이 고양이 ‘코루’다. 아직 좀 더 작업을 해야 한다. 아마 연말에야 겨우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은 저녁이 있는 심심한 삶이 만들어낸 내겐 중요한 존재다. 또 브런치는 그 작품들의 소중한 전시공간이다. 내년에도 그림을 꾸준히 그려서 10개의 작품과 그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응원을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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