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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레 Mar 25. 2021

제주의 오소록한 길을 걷다

법환포구에서 막걸리 한 사발

장마철부터 낙엽 뒹구는 가을, 바람 찬 겨울도 지나 이제는 봄을 맞는 지금까지... 포구 한켠에 걸쳐 앉아 막걸리를 그것도 제주막걸리를 마시는 그림이라니, 그리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어려운 시간을 보낸 건 분명해 보인다.


코로나19 덕분에 이 그림을 그려오던 미술 수업이 가을학기, 겨울학기를 쉬고 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그 덕에 그림도 멈춰 서 있었다.


그림 속 풍경은 두 올레꾼(이라고 쓰고 괸당이라고 읽는)이 몇 해 전 제주올레걷기축제가 열리던 7코스를 걷다가 점심 포인트인 법환 바다를 배경으로 포구 한켠에서 막걸리를 한 잔씩을 놓고 즐기는 장면을 잘라낸 것이다. 사진 속에서는 파전이지만 그림에선 내가 좋아하는 성게알을 내놓았다. 두 사람은 서귀포 이주민으로 제주올레길을 즐겨 걷고 자원봉사를 해오고 있다.


제주에서 살아본 사람으로서… (고작 일 년살이라지만 어깨가 솟는 이 뿜뿜 자부심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제주 사람들은 본격 귤 수확이 시작되면 한 두 달은 정신없이 바쁘다. 바로 그 직전 귤밭에는 귤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하늘은 높아 특별히 걷기 좋은 가을, 그 계절에 제주올레걷기축제가 열린다.


11월이 시작되는 첫 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일 동안 26개 제주올레길 가운데, 하루에 한 코스를 걷고 바로 그 길 위에서 다채로운 공연과 전시가 펼쳐지는 것이다. 최근 10년 동안 가을이면 3일 동안 3개 코스의 올레길에서 축제가 열렸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작년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현한 거리 축제로 한 코스당 15명을 신청받아 총 23일 동안 전 코스에서 열렸다. 올해는 어떨련지.

그림의 공간인 법환포구는 한반도를 강타할 대형 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할 참이면 방송국 기자들이 몰려오는 소위 그림이 나오는 포구다. 태풍이 제주에 상륙했음을 거대한 파도와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속에서 가열차게 전달하는 기자는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 난 뒤 한 마디를 덧붙이곤 한다. “법환포구에서 A사 000이었습니다”라고.


혹 들어본 일이 없다면 올여름 태풍이 시작될 때 뉴스를 주목해서 보시기를. 드높은 파도가 거침없이 다가오는 태풍의 진면목을 법환포구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


10년 전 즈음 태풍이 불어닥친 여름 끝 무렵 법환포구의 작은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는데, 조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 작은 휴게실이 방송사 기자들로 들끓는 프레스센터로 변신했다. 그 시절에는 민박집을 제외하고 법환포구 인근에 그 게스트하우스가 거의 유일한 숙박시설이었다.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서 동네 반장 홍두식 역으로 출연한 고 김주혁의 동네, 마을 청년들의 집단 싸움 장면을 찍은 장소도 법환포구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속 법환포구는 지금과 닮았지만 더 시골스럽고 정겹다.

강민아. 법환포구. 2021. Oil on canvas. 24.2x33.4cm

법환포구에는 해녀학교도 있다. 함덕에 위치한 한수풀해녀학교에 이어 2016년 서귀포에 생긴 법환좀녀마을해녀학교를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좀녀마을해녀학교에 1기로 입학한 나의 동기들 중 여럿이 현재 제주 바다 곳곳에서 해녀로 활동하고 있다.


법환 바다를 실습장으로 사용하는 해녀학교에서 수직 잠수를 배우고, 성게와 소라를 잡으면서 나는 법환 바다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귀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흔히 자기 마을에서 또는 자기 집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풍경 자랑이 벌어진다. 고도제한으로 3층 이상의 건물도 드물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해안가 주택에서도 한라산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좀 다르다.


최근엔 해녀 조각상이 있는 법환포구 바로 앞에 무려 ‘오피스텔’도 생겼다. 시골 바닷가 마을에 신축한 이 오피스텔은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광고와 함께 분양을 시작했고, 최근 입주도 진행되고 있다. 아름다운 곳부터 가만두지 않고 난개발이 이뤄지니 대평리에 이어 법환포구도 예전 같지 않아 안타까움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올레길 7코스의 중간 지점에 있는 법환포구에는 오랜 역사를 가진 포구식당이 있어서 관광객들에게 소개하기 좋고, 해물을 잔뜩 넣은 자장면과 짬뽕을 먹을 수 있는 중국집 올레차이나타운도 있다. 포장마차 같은 이색 먹거리를 즐기고 싶은 지역 사람들도 많이 찾는 실내포차도 있으니 법환마을은 올레길을 걷다가 쉬어가기 좋은 마을이다. 그림 속 올레꾼들처럼 바다를 친구 삼아 제주막걸리 한 사발도 더없이 좋다.


생 유산균이라는 슬로건을 단 제주막걸리는 제주도 내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진짜 제주막걸리다. 흔히 제주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우도땅콩막걸리, 톡쏘는감귤막걸리, 조껍데기막걸리는 경기도와 충정도에서 만들어 제주로 들어오는 막걸리들로 제주막걸리와는 차이가 있다.


지역에 가면 꼭 그 지역 막걸리를 맛보는 나는 제주 여행 중에 꼭 한 번은 제주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제주막걸리는 순하고, 보드랍고, 목 넘김이 좋다. 뒷맛이 물리거나 역한 느낌도 없다. 약간의 탄산도 재미를 준다. 상큼 시원한 제주막걸리 한잔이 그립다. 법환포구가, 서귀포가, 제주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주를 떠나오기 직전 아쉬움을 나누느라 만난 친구들과 언제나 처럼 제주막걸리를 마시고, 우리는 다음날 하루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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