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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마레 Mar 30. 2020

스톤헨지가 왜 거기서 나와?

아보카도가 먹고 싶었을 뿐이에요

미술 수업에서 해바라기만큼이나 인기 있는 소재는 사과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과일인 만큼 빨갛거나 연둣빛이 고운 사과 그림은 수강생들 말고도 인상주의 화가 모네, 마네, 쿠르베도 그렸다.


물론, 각자의 화풍에 따라 사과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전통적인 화법을 거부하고 도발적인 그림을 그렸던 마네와 그를 쫓아 원근법과 명암을 무시했던 모네의 사과, 세밀하게 그려진  쿠르베의 사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쿠르베, 마네, 모네, 세잔의 사과들 혹은 사과바구니

시기적으로는 세밀한 표현이 돋보이는 쿠르베의 사과가 가장 먼저 그려졌다. 마네는 정말 대충 그린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과의 생동감은 그대로 담아냈다. 이것이 바로 인상주의. 빛을 그리기 위해 사과 바구니를 이용한 것만 같은 모네의 그림까지 화가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과를 통해서.  


평생 사과만 그렸다고 해도 억울할게 별로 없는 화가 세잔도 있다. 오히려 그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놀라게 해 주겠다”라고 큰소리도 뻥뻥 쳤다. 움직이지 않고 오래오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델로 사과를 선택한 세잔은 순간의 사과가 아니라 형태에 집중해 진짜를 그리려고 노력했다. 세잔의 사과는 원근감이 거의 없이 모든 사과 하나하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구도에 집중한 평면적 캔버스 속 사과들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월 함께 전시회를 했던 작가들 중에는 청과물 시장에서 본 나무상자 가득 담긴 붉은 사과를, 첫 수확한 초록 사과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그린 분들도 계셨다. 하나하나 다르게 생긴 사과를 그려가면서 자녀와의 사랑, 부모님과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등 정말 하나하나 다른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소회도 기억에 남는다.

유화 한 작품은 보통 3개월 이상에 걸쳐 완성한다. 일주일에 2시간씩 두 번 수업을 하는데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다 보니, 야근이나 출장으로 매번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유화물감의 특성상 말려가며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작품을 끝내고 나면 다음 작품 소재를 찾는 일로도 애를 먹는다. 적어도 3개월 이상 바라보고 속을 끊어야 하는 대상이니까. 새로운 작품으로 사과나 레몬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좀 더 독특하고 맛있는 건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전한 구는 아니면서 둥글고 길쭉하기도 한 표주박 모양에 표면은 울퉁불퉁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씨앗은 무척이나 단단한 이 독특한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최근엔 우리 식생활에도 많이 이용되는 아보가토(Avocado)는 멕시코가 원산지인 과일이다. 하지만 과일이라고 하기엔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맛 때문에 ‘숲 속의 버터’라고도 불린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10여 종 이상의 비타민과 아미노산,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고, 과일로는 드물게 단백질과 지방 성분도 있다. 망고와도 닮았지만 겉과 속이 노란색을 띠는 망고와는 다르게 겉은 짙은 녹색, 속은 옅은 노란색을 띤다. 이색적인 느낌이 좋았고, 사과처럼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 아보카도 잘 익었네”, “씨앗은 좀 말랐네”, “한 입 먹으면 맛있겠다” 아보카도는 스케치를 시작하고 색을 더해가며 생동감이 드러날수록 수업에서 만나는 분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정물화처럼 자연스럽게 놓여있지 않고, 정면을 향해 선 단 하나의 아보카도. 거친 표면과 부드러운 절단면, 단단해 보이는 씨앗이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이 이상해 보일 법도 하지만, 4호(24.2 ×33.4cm) 짜리 작은 캔버스에 나란히 자리를 잡은 모양이 아기자기한 느낌도 주었던 모양이다.


사실, 귀엽자고 그린 작품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실물 아보가토가 저렇게 홀로 서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보가토 만큼 반전 매력이 넘치는 식자재도 없을 것이다. 당당하게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개인, 내면을 채운 부드러움과 그 안에 단단함. 그리고 하나지만 전혀 다른 매력이 담긴... 내가 좋아하는 면들을 모아 그렸다. 그들의 사과처럼.


미술 수업에서 만나 함께 그림 그리는 분들과 겨울이면 일 년 동안 준비한 작품을 공개하는 공동 전시회를 연다. 작년까지는 제주에서 지내느라 참여하지 못했는데, 지난 1월 전시회에서는 이 그림이 전시회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강민아. Stonehenge. 2019. oil on canvas. 24.2x33.4cm

작품의 제목은 Stonehenge, 푸른 초원 위에 거대한 돌처럼 아보가토의 표면과 절단면, 씨앗이 각기 분해되어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영국의 고대 유물처럼 보였던 친구 J가 추천했다.


먹음직한 소재를 그린 작품 중에 마네의 아스파라거스에 얽힌 이야기가 꽤나 흥미롭다. 1880년 마네는 미술품 수집가이자 평론가였던 샤를 에프 뤼시에게 정물화를 주문받고 아스파라거스 한 묶음을 그려 보냈다. 800프랑을 받기로 했는데, 의뢰인은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1,000프랑을 보내왔다.

마네 '아스파라거스 다발', 1880년, oil on canvas. 46x55㎝,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아스파라거스 16.5x21.0cm. 오르세미술관

그러자 마네는 작은 그림을 하나 더 그려 보내며 "묶음에서 아스파라거스 하나가 빠졌네요"라고 했단다. 200프랑짜리 아스파라거스 한 줄기를 말이다. 당시 200프랑은 현재 우리 돈으로 800만 원 정도라고 하니 마네는 고마움을 표현한 것일 게다.


명작에 대한 오마주랄까. 내겐 200프랑짜리 아스파라거스가 더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단 하나의 아보카도를 쪼개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아보가토를 더 다양하게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1,000프랑이 부족하지 않도록.  


아스파라거스는 중세 유럽에서 음식의 왕으로 불리며 왕과 귀족들이 즐겨먹은 음식이지만 수녀원에서의 금기 식품이었다. 호르몬 성분이 많은 데다 피부미용에 탁월한 효과 때문에 수녀님들이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못 먹게 했다는 것. 수녀님을 유혹하는 놈들이 문제 아니냐고 묻고 싶다.  


오래전 이태리 요리를 배울 때 선생님은 "4월 나는 아스파라거스는 내가 먹고, 5월에 나는 아스파라거스는 주인에게 주고, 6월에 나는 아스파라거스는 당나귀에게 준다“라는 스페인 속담을 배웠다. 아직 3월이니 말에게 뺏기기 전에 우리는 아스파라거스를 먹어야 할 것이다.


그림 산책인지, 과일 산책인지... 어쨌든 식자재 그림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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