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4일의 기억. 아일랜드에는 벚꽃이 피어 있었다
아일랜드에서의 첫 이틀은 정말, 마법 같은 날이었다.
출국 이틀 전부터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하며 덜덜 떨며 밤을 꼬박 지새우고, 버스에 올라타 인천공항 샤워실에서 샤워를 한 뒤 정신을 추스르고, 면세점에서 미리 신청한 물건들을 받고 비행기에 올랐다.
13시간 가량 인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운 좋게도 다리가 쭉 펴지는 넓은 자리에 앉아 한국 분 두 분과 신나게 수다를 떨다, 영화를 보다, 먹다가, 수다를 떨다 헤어지고 나서, 터미널을 헤매다 다시 한 번 짐 검사를 거치고, 초조하게 홈스테이 정보와 짐을 다시 한 번 더 확인 한 뒤, 약병처럼 생긴 레모네이드를 한 병 사 마신 뒤 더블린 행 비행기에 올라 탔다.
동양인은 나밖에 없는, 시끌벅적하고 좁은 비행기를 타고 밤 11시가 다 되어 도착한 더블린 공항은, 나무로 된 바닥과 벽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 입국 수속을 밟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밤공기는 마치 초겨울처럼 쌀쌀했고. 밤바람도 무섭게 불었다.
공항 앞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나서 내린 곳은 가로등불조차 차갑고 어둑했다. 구글맵에 나온 홈스테이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호스트 맘 대신 한 흑인 남성이 나를 맞았다. 아니. 이게 뭐지. 어떻게 된일이지?
[엄...? 여기가 설리반여사 거주지 아닌가요?] [그런 사람 모르는데? 왜 그래?] [아. 나 홈스테이를 예약했는데. 지도에서 여기라고 하더라구.] 사색이 된 나를 보며 고민하던 남자 뒤로 애인인 듯한 백인여자가 내려오더니, 추우니 일단 들어오라며 안으로 초대했다. [걱정 마. 우리 너 유괴 안해!] 그리고 어디서 왔냐, 왜 아일랜드로 왔냐. 너 스물일곱처럼 안보여. 등의 말을 주고받으며 갓 이 동네로 이사 왔다던 커플은, 나를 안심시키고, 같이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혹시 이 집이 아닌가, 호스트 맘을 아는 사람이 없는가를 확인해주고, 호스트 맘에게 메일을 보내고, 연락이 없자 갑자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를 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다 해보겠다는 것. 친구들도 가능하지 않다고 하자 흑인 남성이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혹시 오늘밤만 너희 소파에서 자면 안될까? 숙박비는 지불할께 물론.]이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했다.
[아니. 미안해. 사실 그럴 수 있으면 처음부터 그랬겠지만, 우리가 다섯 시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해.] [잠깐만. 다섯 시라고? 지금 열두 시 오분이잖아? 고마워. 정말 … 와. 이게 말로만 듣던 아이리쉬 호스피탈리티구나. 어떻게 감사를 해야할지 모르겠어.] [아니야. 이 춥고 깜깜한 밤에 택시도 안오는 거리에 널 밖으로 내모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야. 우리는 뉴욕에 살다 와서 니가 지금 여기가 얼마나 무서울지 알아. 니 이름은 아까 예약확인서에서 봤어. 욘생.] [악! 미안해! 정말 예의도 없었구나! 경황이 없었어. 미안해. 내 이름은 윤상이야.] [나는 로버트. 그리고 여기는 발레리.]
택시가 도착하고, 짐을 다시 꾸리던 나에게 로버트가 내민 것은. 10유로 지폐 두 장이었다. [너 택시비 할 돈 없을 것 같아서. 더블린 운전기사들은 잔돈 잘 안 들고 다니고 그러거든.] [아니야. 나 공항에서 택시 타고 와서 괜찮아. 10유로짜리 지폐도 많이 바꿔 왔어. 내가 너희에게 돈을 줘도 모자랄 판인데. 이미 너무 폐를 끼쳤어. 받을 수 없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 타인에게서 오는 친절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나는 택시 앞에서 보답을 해야할 것 같아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호스트 맘에게 선물로 주려고 사 온 마스크팩은 이미 택시 트렁크로 들어간 캐리어 깊숙히 묻혀있었고, 그들이 나에게 주려던 만큼의 돈을 지불해서 그들의 친절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가방을 뒤지던 내 손에 부스럭거리는 얇은 비닐이 잡혔다. [이거, 내가 가져온 핫팩이야. 한국에서 사 왔지만 사실 일본에서 만든 거구. 일회용이고 비싸지도 않아. 추운 아일랜드에서 따뜻한 뭔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었어. 그런데 그건 너희에게 이미 받은 것 같아. 그래서 잠깐이라도 나한테 온기를 베푼 손이 따뜻하면 좋겠어. 정말 고마워.] 택시에 오르고, 고맙다고 말하며 손을 흔들면서도 방금 나에게 일어난 이 모든 친절이, 믿기지가 않았다.
호스텔로 향하며 자초지종을 들은 택시기사는 나에게 말했다. [아일랜드에 온걸 환영해!] 13유로가 나와 20유로를 주고 5유로만 달랬는데, 팁조차 받지 않으며 말했다.
[행운을 빌게. 다시 한 번 환영해!] 그가 데려다 준 호스텔은 시트가 깨끗했고, 따뜻한물도 콸콸 나왔다. 6인실 가격도 16유로밖에 안 했다.
아침이 밝고 나서, 홈스테이맘인 디어드라가 메일을 보냈다. 밤에는 인터넷을 꺼둔다고. 사이트에서 우리 집을 이상하게 표시해놨다고. 발레리가 보낸 분노의 메일을 아침에 보고서야 알았다고.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택시를 잡으려 헤메다 어느 새 강가로 나왔다. 더블린을 관통하는 강이라기엔 너무 좁아, 차마 리피강이라고 생각하진 못한 그 강변이 바로 내가 매일 거닐게 된 리피강이었다. 새로 호스트 맘의 안내를 받아 간 집은 알고 보니 내가 아일랜드의 천사들을 만난 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교통비라거나 어제의 불편을 생각해도 주말과 부활절 때문에 가격이 왕창 솟아오른 호스텔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했기에, 고민 끝에 예정대로 머물기로 결정했고, 휴대폰 유심을 구매하고 편한 옷도 좀 살 겸, 호스트 맘인 디가 알려준 쇼핑센터로 향했다.
그런데. 비가 쏟아졌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소리가 둔탁해지더니 우박과 비가 섞여 내렸다. 언제나 그렇듯 길도 잃어버려 1시간을 헤메다가 쇼핑센터에 도착했고, 이동통신 3에서 유심을 구매하고 무제한 요금제를 탑업한 후, 옷 싸게 팔기로 유명하다는 페니스로 향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오트밀색 브이넥이 있었다. 가격도 완전 싸다. 7유로라니! 이게?
하지만 사이즈가 나의 유럽에서의 정사이즈, XS와 S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너무 타이트해 옆의 점원에게 사이즈를 문의했다. [저기, 이거 혹시 사이즈 M 있어?] [어어? 그거. 창고에. 있을꺼야.] 그리고 점원은 잽싸게 창고로 달려갔다. 점원이 들고 돌아온 것은 눈처럼 하얀 M사이즈 브이넥이었다.
[여기있어!] [음… 나는 흰색말고 이 오트밀색을 사고싶어서 물어봤었어.] [기다려!] [확인해봤는데, 없어.]
그러더니 매니저가 다가와 물었다. [아까 버트가 재고 정리해서, 버트가 알꺼야 그웬. 버트!] [근데 내가 두번이나 확인했어!] [어 정말? 버트 됐어. 그웬이 확인했대. 그웬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 여점원은 다운증후군 환자였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과 수다를 떨고, 함께 웃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다른 직원들도 그녀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아. 정말. 이 가혹하고 거친 나라에, 춘삼월말에 진눈깨비가 칼바람에 흩날리는 나라에, 계란과 토마토를 던져댄다는 틴에이저들이 있는 나라에, 워홀러들을 찌꺼기 취급한다는 아이리쉬 고용주들이 있고, 실업률과 집값도 한국만큼 지옥 같다는 아일랜드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오자마자 나는 이틀만에 이 나라에 반해버렸다.
길고 길었던 무서운 밤을 지나 도착한, 우박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일랜드에도, 벚꽃은 피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