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5일의 기억.
더블린에서 맞는 두 번째 아침, 몇 가지 일을 처리하러 시티 센터로 가려고 버스를 탔다.
더블린에서 버스 타는 풍경은 사실 도착한지 한 달이 된 후에도 여전히 낯설었다.
버스가 다가온다. 한국이나 여타 다른 나라처럼 기사분과 아이 컨택을 한다.
한국에서는 기사분이 무뚝뚝하게 쳐다보며 버스를 세우지만, 더블린에서는 기사분이 운전석에서 [하이] 라고 씩 웃으면서 그냥 지나가버린다. 당연히, 나는 몇 번이나 손드는걸 까먹고 아이 컨택만 시도하다가 다음버스를 타곤 했다.
더블린에서는 자신이 탈 버스가 다가오면, 히치하이킹이라도 하듯 한 손을 들어 탈 의사를 표시한다.
손을 드는 포즈도 제각각이다. 히치하이킹 하듯 엄지 척, 디스코라도 추는 것처럼 검지 척, 혹은 쇼생크 탈출 주인공마냥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프리덤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모든 게 너무 낯설던 초반에는,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남자가 엄지를 척 들어 버스를 세우고 여자를 버스에 태우며 작별키스를 하는걸 볼 때마다 뭔가 없어보이면서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블린의 버스는 또 구간마다 요금이 다른데, 버스 정기권을 구매하지 않으면 버스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교통카드를 찍거나 동전으로 버스비를 지불해야한다. 나는 또 버스 타면서 밍기적대기가 싫어서 미리 인터넷으로 구간 요금을 검색하고, 2.8유로를 딱 맞춰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다음 버스가 오자마자 엄지를 세운 손을 소심하게 휙 흔들고 올라타자마자 말했다. [좋은아침. 오코넬 스트리트 가는데, 2.8유로 맞지?] [맞아. 근데 립 카드 만들어. 그게 훨씬 더 싸. 출발한다.] [응. 고마워.] 시크한기사 아저씨를 지나쳐, 당연히 나는 더블린 초짜티를 폴폴 내며 2층으로 올라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멘붕이 시작되었다. 전광판에는 멈추는 정류장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몇몇 버스는 전광판 대신 스탑 사인만이 달려 있고, 내가 초기 한 달동안 잡아 탄 버스는 공교롭게도 죄다 스탑 사인만 달려 있는 버스였다. 그저 이번에 멈춘다는 것만 표시가 될 뿐. 혹여 내리는 곳을 놓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에 잘 들리지도 않는 방송에 귀를 귀울이는데, 옆에 앉은 폴란드 남자 네명은 끊임없이 폴란드어로 웃고 떠들어댔다. 갑자기 그 중 하나가 나에게 얼굴을 휙 들이대며 물었다. [실례합니다. 시티 센터 아직 안 지났죠?] [엉? 사실 나도 여기 처음이야.] [으잌ㅋㅋㅋㅋㅋㅋㅋ] [허허허...] 알고보니 2층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전부다 더블린 초짜들이었다.
그래도 걱정과는 달리, 오코넬 스트리트는 도착하자마자 중심지라는 기운이 풍겼다.
더블린의 상징이라는 뾰족한 은색 기둥. 스파이어가 솟아올라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던 비자 연장을 위해 이민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참 특이하게도, 워킹 홀리데이 비자 승인을 한국에서 받아도, 여기 와서 또 다시 승인을 받아야 했다. 참고로,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기한은 1년. 그리고 입국 시 받는 관광비자의 기한은 1개월~3개월 사이로 입국심사관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비자 연장을 신청한 날부터 1년이다. 다시 말 해, 입국 이후 1년 3개월까지 머무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비자 연장을 신청하지 않으면 일도 구할 수 없기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이민국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라, 아직은 괜찮겠지 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민국에 들어가자마자 창구 앞에 놓인 안내판. <사람 많아서 오늘 티켓발행 끝났습니다> 당황한 나는 유리 보호벽 속에서 턱을 괴고 있는 창구직원에게 걸어갔고, 익숙한 만성적인 귀찮음을 감지했다. 아, 저 눈빛은 분명히 내가 교직원 할 시절 사무실 셔터 내릴때 오는 학생들에게 발산하던 그 눈빛이다.
[좋은 아침. 혹시 GNIB 대기표 못 받아요?] [응. 끝났어. 내일 다시 와.] [몇 시에 열어요?] [7시. 30분. 잘 가~] 내 멘탈은 물을 끼얹은 지점토마냥 흐물해졌고, 나는 뭘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나는 기름지고, 짭짤하고, 뜨끈한 뭔가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슈퍼맥이라는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가 주문한 것은아이리쉬 브랙퍼스트.
음식을 받아 들고 출구 바로 옆 창가자리에 앉았는데, 노숙자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특유의 아이리쉬 발음으로[쀀!] 이라고 외치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왜 그러나 벙찐 표정으로 의아해 하고 있는데, 화장실로 가는 2층 입구를 경비원이 지키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청소하던 스탭이 다가와 설명 해줬다. 나에게 향하지도 않은 욕설을 다시 듣고 싶지 않기도 하고 문이 열릴 때마다 찬바람이 불어와, 2층으로 올라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반숙계란 노른자를 톡 터트려 버터 바른 식빵을 찍어먹자,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지방보다 살코기가 더 많고, 바싹 익히지 않은 베이컨도 뭔가 색다른 맛이었다. 살짝 매콤한 소시지는 입맛을 돋궈 줬고, 퍽퍽한 갈색빵도 호밀빵과는 다른 맛이 났다. 그리고 내가 아이리쉬 브랙퍼스트를 사먹은 주된 이유, 블랙푸딩! 뭔가 순대같은 맛이 날 꺼라고 예상했던 블랙푸딩을 먹자마자,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의 맛이 느껴졌다. 명절의 맛이었다. 동그랑땡 맛이 났다. 거기다 안에 곡물까지 박혀있어 동그랑땡이랑 밥을 같이 먹는 것 같은 식감이었다.
어쨌든 따끈한 식사와 커피로 멘탈을 다시 빚은 나는 4시에 보러 가기로 한 집에 연락을 했다. [안녕. 나 너랑 어제 통화했던 앤데, 나 이민국에서 볼일을 못 보게 되서그냥 시티센터에서 방황하는 중이야. 괜찮으면 지금 집 보러 가도 될까?] [응. 나 집에 있어. 오면 전화해!] 한 달에 20유로라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저렴한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도 가입했고, 보조배터리도 빵빵하겠다, 구글맵을 켠 나는 더블린 3구역에 위치한 집으로 요즘 꽂힌 노래를 반복재생해 들으며 걷기 시작했다.
한 성당 주변을 지나가던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칭! 춍! 쑝! 쐥!] 아, 크랙헤드 네마리였다. 크랙에 취하디 취해 나란쌀람이 듕국에 살다온줄 아는것 같았다. 약쟁이들은 보통 자기들끼리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위험한 눈으로 그저 지나가는 이들을 쓱 흝기만 하는줄 알았는데, 야생의 크랙헤드 무리에게 짖기 공격을 당한 나는 마치 돌맞은 사파리 포켓몬마냥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파트로 향하는 길은 너무나도 무섭고, 불안했다.
구글맵에 표시된 곳으로 도착해 집 대표격인 알렉스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후, 키가 나보다 조금 작은, 얼굴이 착해보이는 라티노가 나타났다. [안녕. 니가 집보러 온애 맞아?] [응. 이름이 좀 어렵지? 윤상이라고 해. 알렉스, 맞지?] [응. 반가워.] 아파트 철문을 지나 안내를 들으며 내 소개를 하고, 정원을 걸어 아파트로 들어가자 마자, 나는 속으로 외쳤다. [와, 여기다. 여기야.]
집에 사는 사람은 알렉스와 알렉스 누나,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온 그녀의 약혼자. 알렉스와 내가 같은 방을 쓰고, 밖에있는 욕실을 둘이서 같이 쓴다고 했다.
어차피 4명이서 쓰는 집을 들어가려고 했고, 욕실이 한개인 곳을 예상했기에 렌트가 조금 높긴 했지만 집도 네명이 쓰는 집이라기엔 너무 깨끗했고, 위치도 사실 조금 위험하지만 더블린 센터에서도 지금 사는 홈스테이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가까웠기에,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음... 그래서, 너 여기 마음에 들어?] [응!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여기 주변에 안전해?] [응. 여기 안전해.] [나 여기 오다가 정키 만났는데?] [누구?] [크랙헤드. 마약하는 애들 말이야. 개네가 나한테 칭! 춍! 쑝! 쐥! 이러면서 소리도 질렀어.] [너 혹시 그 교회쪽으로 걸어온거야?] [응. 왜?] [너 큰일 날 뻔했어! 다시는 거기 가지마.] [그래? 여기만 안전하면 나는 여기 마음에 들어.] [알았어. 그냥 말해두는 건데, 서른명 넘게 보고갔는데 지금까지는 니가 마음에 들어. 우리는 아이리쉬도 싫고, 어느나라에서 왔건 어린 학생들도 싫고, 포르투갈어나 스패니쉬 하는 애들도 싫고, 그리고, 브라질리언은 절대로, 절대로 싫어.] [음... 왜??] [우리는 파티 금지, 소음 금지거든. 아파트 전체 규칙이야. 물론 술을 마시거나 파티하고 싶으면, 같이 나가서 놀면 돼.] [좋아. 나도 한국나이로는 내년에 서른 살이야. 어리지도 않고, 집안에서 떠드는 것도 싫어. 그리고 나 사실 너네 아파트 깨끗한 사람 구한대서 온거야. 나 너네가 아파트 깨끗하게 쓰는게 너무 마음에 들어.] [알았어. 그러면 내가 너한테 오늘 밤이나 내일 연락을 줄게.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알았어. 아. 잠깐. 집이랑 상관 없는 거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뭐야?] [립카드 어디서 살 수 있어?] [저기 버스정류장 보이지? 저기 뒤로 걸어가면 갈라라는 곳이 있어. 슈퍼인데, 거기서 살수 있을거야.] [응, 고마워. 나 너희 집이 참 마음에 들거든. 꼭 연락 줬으면 좋겠어.] [응. 알겠어. 설사 안 되더라도 연락 줄게. 조심해서 가!]
알렉스가 가르쳐준 갈라로 향한 나는, 계산대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직감했다. (아, 저 남자, 한국인이다. 한국인이야.) 그리고 그 남자의 악센트에서 확신했다. 이 남자는 분명 한국인이 맞다. [안녕. 여기서 립카드 살수있어?] [응. 물론. 그런데 립카드 수수료 5유로 있어.] [응. 알겠어. 여기 20유로. 5유로는 수수료, 그리고 15유로 탑업해줘.] [응 알겠어.] 그리고 남자가 청개구리가 그려진 교통카드와 함께 건넨 것은, 10유로 탑업 영수증과 5유로 지폐였다. 청개구리 같으니라고. 5유로를 다시 주며 탑업을 한 후, 그 한국인 남자와 (나는 니가 한국인인걸 알고있다. 근데 딱히 아는척은 안할꺼다.)라는 의미의 눈빛을 주고받으며 가게를 나와 센터로 걸어가며 알렉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덕분에 갈라에서 립카드 잘 샀어! 연락 기다릴께! 고마워!]
이상하게 돌아가는 길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돌아가다 뒤를 돌아보니, 기발한 코카콜라 광고도 눈에 들어왔다. 집이 정말 마음에 들었거나, 갑자기 비치는 햇살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들었다던 알렉스는 내가 묵는 홈스테이로 올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