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6일의 기억을 더듬다.
더블린에서의 세 번째 아침이 밝았고, 여전히 알렉스에게서 문자는 오지 않았다.
나는 오늘은 기필코, 이민국에서 비자 연장을 하고 말리라 하는 굳은 다짐으로 최대한 피해가 되지 않을 시간에욕실로 들어가 온수기 버튼을 누르고, 마치 한 명의 락커마냥 [크우롸롸롸롸] 하고 울부짖는 온수기 샤워에서 쫄쫄쫄 나오는 물로 빠르게 샤워를 끝내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탈 버스가 다가와 어색함에 몸서리치며 엄지 척! 을 시전했는데, 버스 운전기사는 사람도 별로 없는 버스를 세우지도 않은 채 그냥 지나가 버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두 손을 쳐들며 [진짜? 진심으로?!] 라며 버스를 쳐다보며 소리쳤고, 내 뒤에 서 있던 아이리쉬 아저씨도 어이가 없는지, 킥보드를 탄자기 아이가 바로 뒤에 있는데도 [뿨큉 이디옽!] 이라며 항의의 표시로 두 손을 쳐들며 버스 뒤통수를 허망하게 쳐다봤다. [아~걱정 마. 가끔씩 저런 싸가지들이 있어. 너한테만 그런 거 아니야.] [응. 고마워. 다른 것도 시티센터 가잖아, 그지?][그래. 오히려 잘된 거야. 저거 뺑뺑 돌아가거든.] [고마워. 다음에는 꼭 타자.][그래야지. 다음에는 우리 아예 처음부터 두 손을 들어버리자고. 저 얼간이들이 잘 볼 수 있게.] 뭔가 무섭게 유쾌한 아저씨와 함께다음에 온 버스에 올라탔지만, 이럴수가. 더블린에도 교통체증이 있었다. 출근시간 때문인지 버스는 정말 느림보처럼 굴러갔고, 더군다나 버스 전용 차로에서 느릿느릿 버스 앞을 달리는, 노란 형광색 바람막이를 입고 전문 라이더마냥헬멧을 쓴 자전거 통근객들 덕분에 8시가 훨씬 넘어서야 시티 센터에 도착한 나는 불안한 걸음을 재촉해 이민국으로 들어갔다. 어제의 그 귀찮은 표정의 아저씨에게 GNIB때문에왔다고 말하자, [15번으로 가아~] 라고 말을 하고,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15번 창구로 가자 인상좋은 할아버지가 계셨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워킹홀리데이로 왔어?] [네.][여기 번호표. 163번. 11시 30분쯤 오면 될 꺼야.] [네. 고마워요. 좋은하루!] [잘가. 좋은하루.] 스타벅스에서 2시간정도를 기다리다, 10시 30분쯤 이민국으로 갔는데,아직도 번호는 80번 대. 하지만 딱히 나가서 돈을 더 쓰고 싶지도 않았기에 사람냄새가 엄청나게 나는 이민국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창구에앉아 있는데, 열한시쯤 갑자기 전화기가 울렸다. 알렉스의현재 룸메이트인 세자르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윤생? 안녕. 어제, 알렉스 만났어?] [응, 응. 만났어. 미안한데 지금 나 사람 많은 데라서, 전화하기 좀 곤란해. 문자로 하자.][뭐라고? 미안, 내가 영어를 못해서. 잘 못 알아들어.] [왓츠앱으로 문자할게!] [어. 알았어!] 세자르의말인즉, 내가 원한다면, 이 방은 내 것이라는 것. 오늘 디파짓을 줄 수 있냐는 것.
가뜩이나 집 구하기 힘든 더블린에서, 첫 인터뷰에서 집을 얻은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사기라도 당할까봐 두렵기도 했고. 그래서 세자르에겐 미안하지만, 오늘은 이민국에 사람이 많아 가기 힘들 것 같으니, 내가 알렉스와직접 문자를 한 후 내일 찾아가거나 하겠다.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열두시가 되어 새라가 점심약속을 기다리다 지쳐 전화가 왔고, 미안하다고, 아직 이민국이라고 이야기를 한 후 오후 두시가 다 되서야 내 번호가 불렸는데, 내가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는 여직원. 굳은 표정으로 모든 대화를 손가락으로 했다. 그래도 대충 절차를알고 있었기에, 그 손가락을 따라 접수를 진행했고, 그 여직원이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앉아.] [나 앉아있는데?] 다시금 손가락이 창구 바깥의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또다시 기다림의연속, 사십분쯤 지났을까, [윤상 송, 사우스 코리아.] 외국인이 내 이름을 틀리지 않고 발음했다는 것에놀라며 지문을 찍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전 여직원보다는 더 친절했던 키가 큰 남자직원의 손에 이끌려주민등록증 만들 때 마냥 열 손가락 지문을 다 찍고, 밖으로 나가는데 한 여자가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고항의를 하자, 지문을 찍으며 나한텐 그나마 친절했던 이민국 직원은 [여기있는 사람 전부다 기다리는 거야. 성질 급하기는. 너만 피곤하고힘든 줄 알어? 너 브라질리언이지? 당연히 그렇겠지. 참나. 싫으면 니네 나라 있던가.]라고 쿨함을 넘어서서 냉랭한 멘트를 쏘아붙였다. 그리고,또다시 삼십분 쯤 후에, 1번 창구로 오라는 방송이 들렸다. 이번 여직원도 묵언수행 중이셨다. 내 여권을 뒤적뒤적이더니 여권사진과 내 얼굴, GNIB 카드에 찍힌 흑백사진을 검지로 번갈아 가리키더니, 내가 [응, 그거 나맞아.] 라고 하니 GNIB 카드와 여권을 창구아래로 던졌다. 작별인사 따위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 일련의 행동들에 기분이 나쁘지않았다고 하면, 100% 가식이고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어쩌겠나. 자기 나라 국민에게도 친절하지 않다는 아이리쉬 공무원들인데.하물며 자기나라에 돈 벌러 온 외노자들에게, 아무리 아이리쉬 호스피탈리티가 어쩌니 저쩌니해도, 마냥 관대할 수 밖엔 없는 것이다.
세계 어디를 가 봐도, 행정기관에서 외국인을 자국민보다 더 대접해주고, 자국민들이 피땀 흘려 벌어 낸 귀한 세금 펑펑 써서는 한국인은 관련 업무 공무원들 빼곤 하나도 없고, 외국인들끼리 지네 나라 요리나 해먹고 있는 다문화 큰잔치 같은 걸 열어주는 멍청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거라는 게 내 평소 생각이었기에, 그 대접에 그렇게 길게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민원업무가 얼마나 힘들고 지치는 업무인지도 알고 있기에, 이해가 갔다. 나 역시 일하던 대학에서 스쿨버스 시스템을 부분 유료로 바꿔 갑자기 업무에 교통카드 판매 및 충전이 추가되었고, 내 업무를 할 시간도 없이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시스템을 설명하고, 항의하는 학생들을 설득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터널증후군까지 생겨 태블릿에 설명을 적어놓고 업무를 한 적도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방탄유리가 쳐진창구 너머, 그 나라의 적법적인 국민 자격으로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그들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내가 창구 건너편에 앉아있을 때의 그 갑갑함과, 평생 그 자리에서 앉아있다 그럭저럭 살다 죽을 것 같던 두려움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일지, 내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니 기분이 참 오묘해졌다. 이민국에서 나와어울리지도 않게 상념에 젖어 버스를 타고 홈스테이로 돌아온 나에게 알렉스가 왓츠앱으로 연락이 왔다. [헤이, 세자르랑 이야기했어?] [응. 나 이제 이민국에서 나왔어. 안 그래도 문자 하려고 했어. 날선택해줘서 고마워!] [너 좋은 사람 같아서.] [고마워. 하하 (사실 아니야. 착한척 한거야. 그래도 계속 착한 척 해볼게.) 나 너한테 얼마줘야 해?] [바로 들어오는 거 아니니깐, 일단 디파짓만주면 돼. 300유로.] [알겠어. 내일 아침에 가도 될까? 그런데 여기서 센터 가는 게 차가 많이막혀서, 너무 일찍은 안 되고, 10시쯤 될 것 같아.] [그래. 오기 전에 전화해.][응. 알았어. 고마워!]
여전히 여러가지로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달은 걸릴 거라 생각했던 집이 빨리 구해져 한 시름 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홈스테이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