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26일의 기억
저녁 시간이라던 6시 30분이 되었다.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나 나가보니, 홈스테이 집 막내딸이 [저녁먹어!] 라고 하고는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 내려갔다. 주방으로 내려가 접시를 보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예의상 맛있겠다고 멘트라도 해주고 싶은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물에 데친 야채믹스, 그리고 기름에 볶은 냉동 후렌치후라이, 웨지감자, 그리고 손바닥만한 돼지목살 한 조각. 모두 테스코에서 1유로도 안될 가격에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게 4유로라니. 한국돈 4800원이라니. 짬짜면 사먹고 막대사탕 하나 사먹을 돈인데. 강매가 확실했다. 아일랜드 가정식인 건 맞지만, 전통 가정식은 아닌 것도 확실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내가 줬던 올리브영 두장 1500원짜리 벚꽃 마스크팩 선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급스러운 초콜릿 박스와, 코스트코 피자 세 조각을 겹쳐 놓은 것 같은 크기의 파마잔 치즈를 들고 들어온 코가 참 큰 그들은, 앞으로 6일간 묵게 될, 영어를 배우러 잠깐 더블린으로 온 이탈리안 여학생들이라고 했다. 악수를 청하며 내 나이를 듣고 놀라던 그들은, 자리에 앉아 수줍게 [맛있게 먹어.]라고 하며 나와 함께 아일랜드 현대 가정의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역시, 한국에 대해서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 LG, 삼성에 이어 나는 절대 써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멘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두유 노우 싸이?] 당연히 모두가 빵 터졌다. 아. 역시 마법의 단어. 캉남스타일.
학교 수업시간 이야기가 나와, 이탈리아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간다는 말이 나오고, 한국은 어때? 라고 하길래, 내가 어릴때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지만 지금은 안 간다. 하지만 공부시간은 많은 편이다. 라며 고등학교의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설명해주자, 모두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거기에 학원까지 가는 애들도 있다고 하면, 그 표정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지만, 저녁도 다 먹었고, 이탈리아 여학생들이 너무 피곤해보여 [그럼..잘먹었어. 푹 쉬고 나중에 봐!]라고 인사를 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양치를 하고 새라의 방문을 노크했는데, 방이 내방과는 비교도 안되게 따뜻했다. (뭐지?) 혹시나 싶어 내방의 라디에이터를 확인해보니, 열이 올라오지 않았다. 에어가 찬 게 분명했다. 어쩐지 밤에 분명 라디에이터 소리가 들리는데 엄청 춥더라니. [새라, 잠깐만. 혹시 내 방 쓰던 개… 제롬도 춥다고 하지 않았어?] [응, 맞아. 제롬도 라디에이터 안 된다고 했어.] [아니, 그럼 말을 했어야지...나 잠깐 디하고 이야기하고 올게.] [응. 알았어.]
[음…디?] [응, 무슨 일이야?] [내 방에 라디에이터가 안돼. 열이 위로 올라오질 않아.] [잠깐만. 우리 남편 올려 보낼께.] [응!] 이윽고, 건장한 체격의 머리를 빡빡 깎은 아저씨가 나타났다. [안녕!! 윤송 맞지?] [응. 윤상이야.] [자, 뭐가 문제야?] [(아저씨 내 이름 잘못 불렀어.) 에어가 찬 거 같아. 밑에 파이프는 따뜻한데 위로 열이 안 올라와.] [응, 잠깐 기다려.] 새라 방에 건너가 이야기를 하며 놀고 있는데, 패트릭이 다 고쳤다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송! 다 고쳤어! 나 내려간다! 문제 있으면 말해!] [고마워! 패트릭! 나중에 봐!] 그리고 새라와 함께 하는 뒷담화 시간이 시작되었다.
[여기 샤워, 너무 별로지 않아?] [아, 맞아. 샤워. 진짜 이상해. 물도 잘 안 나오고, 어쩔 때는 뜨겁다가, 어쩔 때는 차갑다가… 이상해.] [맞어, 겨우 하루 묵은 호스텔이 그립다 막. 그건 그렇고 새라, 오늘 진짜 미안해. 이민국에서 사람이 너무 많았어.] [PPS 넘버는 받았어?] [아니, 그건 나중에 받아야지. 집 이사하면.] [거기 직원들 장난 아니게 불친절해.] [응…이민국도 불친절하긴 했어. 너는 EU국민이라서 거기 갈 필요 없어서 좋겠다.] [아니야. 그래도 나는 영어를 못해서 여기서 일자리가 너무 안 구해져.] [나는 너처럼 기술도 없고 파트타임 경력도 없어.] [그래도 영어 잘하잖아!] [아니야. 잘 못해. 나 문법이랑 어휘 엄청 못해. 그냥 단순해서 겁도 없이 뱉어대서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프랑스에서는 너 싫어하겠다. 너 영국악센트 비슷하게 섞어 써서.] [아니야, 나 그래도 파리 너무 좋았어. 사람들도 친절했고, 무슈 바토타고 에펠탑 반짝반짝거리는거 봤던 게, 내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중에 하나였어.] [아, 맞아! 그거 진짜 이쁘지! 너 완전 행운이었네!] [같이 같던 친구가 또 기가 막히게 시간 알아와서, 바로 앞에서 배타고 봤어. 진짜 멋졌어.] [또 프랑스에서 마음에 드는 거 있었어?] [음… 음식 괜찮았어. 마카롱 먹겠다고 친구 끌고 다니다가 길 잃어버리고 헤메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나폴레옹이 모자 맡겨놓고 커피마셨다던 르 프로코프라는 레스토랑도 갔었는데, 거기도 맛났었구… 근데 모자는 못 봤고. 아, 난 원래 오랑지나도 좋아했어! 그리고 한국에서 에비앙도 되게 인기 많아.] [아 맞아. 알프스! 우리 꺼야.] [아 맞다. 독일 비행기 알프스 추락 봤어?] [응. 봤어. 정말 끔찍해.] [맞아. 사람들을 나르는데, 그런 미친놈들이 운전하게 놔두는 거 너무 싫어. 정말. 한국도 작년에 비슷한 일이 있었어.] [어떤 거? 아, 그 기사 본 거 같아. 말레이시아 항공기랑 비슷한 때 그랬지. 아, 이런 사고 너무 끔찍해.] [응. 그 단어 말고는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는 것 같아. 끔찍하다.] 갑자기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에 기분이 축 늘어져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 자러 가야겠다. 나 내일 아침에 디파짓 주러 가야 해.] [아, 너 그 연락 왔다는 그 아파트에?] [응. 300유로 디파짓만 일단 주기로 했어.] [잘됐다. 나처럼 은행으로 입금했으면 더 안전했을 껀데.] [뭐, 지금 내가 유럽 국가 은행 계좌가 없으니깐, 수수료가 너무 부담되서.] [그래. 그러면 내일 점심 같이 먹지?] [응. 나 디파짓만 주고 바로 올 꺼야.] [그래. 알겠어. 내일 봐!] [내일 봐!]
생각이 많아져서 잠도 못자고 뒤척일 줄 알았는데,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솔솔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