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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nsang is ainm dom Mar 29. 2016

Fáilte Ireland

2015.03.27일의 기억

아침이 밝아, 또 다시 괴성을 지르는 온수기로 샤워를 끝내고, 버스를 타고 알렉스의 아파트로 향했다. 하지만 구글맵까지 켜놓고도 길을 잃어버렸다.

[알렉스, 나 지금 가는 중인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좀 늦을 것 같아. 미안해.] [괜찮아, 11시 전에만 오면 돼.] 구글맵은 14분만 더 걸어가라는데, 이 동네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 벽에는 온통 그라피티, 길바닥엔 쓰레기. 허름한 슈퍼마켓. 담벼락에 기대 공허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는 동유럽계 아줌마들. 혹시 핸드폰을 뺏기기라도 할까 봐 너무 무서웠다. 주머니에 넣자니 지도는 봐야겠고, 두 손에 휴대폰을 꽉 쥐고 걸어가다 보니, 세상에. 크랙헤드들을 만났던 성당의 문이 나왔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던 그 길보다, 더 위험한 곳을 지나왔나 보다.

혹시나 보증금 사기라도 당할까 봐, 얼굴이 정말 선해보이는 알렉스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알렉스와의 통화를 녹음했다. [알렉스, 나 도착했어. 늦어서 미안.] [어, 괜찮아. 문으로 나갈께.] 통화를 끝내고도 사실 불안했다. 핸드폰의 음성녹음을 누르고, 알렉스를 기다렸다. [왔네. 좋은 아침.] [응, 여기 디파짓. 하나, 둘, 셋. 삼백유로. 맞지?] [응, 맞아.] [11시부터 일하는 거야?] [응, 그래도 시간 맞춰 잘 왔어.] [혹시… 나 PPSN때문에 그러는데, 전기세 영수증이나 그런 것 좀 받을 수 있을까?] [음… 얼마 전에 법 바뀌어서, PPS 넘버는 일 구하고 받는 거라더라, 일 구하기 전에 받는 게 아니라.] [그래? 난 못들은 사실인데.(너 혹시 나한테 사기치는거야?)] [잘 모르겠어. 나도 얼마 전에 여기 온 애한테 들은 거라서.] [흠, 알겠어.] [너 빌딩 코드 필요해?] [뭐라고?] [빌딩 코드. 너 홈스테이에서 여기로 미리 짐 옮겨놔야지. 아무리 나중에 들어온다고 해도 무거운 짐은 여기 들여놔 미리. 나중에 옮길 때 고생 안 하게.] [아니야. 그건 필요할 때 내가 연락 할께.] [너 내 번호 있지?] [응, 있어.] [좋아. 필요하면 언제든 왓츠앱으로 연락해.]


디파짓을 불량배에게 뺏기지 않았다는 안도감 반, 알렉스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혹여 사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 반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은 당연히, 안전한 길로 돌아갔다. 햇살도 좋고, 센터로 들어가자마자 도착한 버스도 뛰어서 잡아탔다. 버스 좌석에 털썩 주저앉자마자 뭔가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홈스테이로 돌아가 새라의 방문을 노크했다.


[새라, 나 지금 왔어.] [아, 디파짓 주고 왔어?] [응.응. 나 그대로 나가면 돼. 나가서 먹거나, 그냥 대충 샌드위치 같은 거 사서 공원에서 먹자. 그게 더 쌀 테니깐.] [응, 5분안에 준비할게.] [응, 내 방에 있을게.] 혹시라도 간식거리가 필요할 것 같아 캐리어에서 워커스 감자칩 두 봉지를 꺼내 가방에 넣는데, 가방을 열자 새콤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래. 이것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구나. 가방 안에는 테스코에서 산, 비타민 D와 칼슘이 듬뿍 들어있어 뼈에 좋다는 4개 2유로짜리 바닐라맛 요거트의 옆구리가 터져 가방안의 모든것을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윤상, 갈 준비 됐어?] [사실은… 요거트가 터졌어.] [뭐? 오…] [음…] 대충 서둘러 씻을 수 있는 것들은 물로 씻고, 가방을 일단 물티슈로 깨끗이 닦아 뒤집어 침대머리에 널었다. 백팩 대신 보스턴백을 집어들고 새라와 함께 쇼핑센터로 향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건 페브리즈였다. 테스코에서 조그만 페브리즈를 집어드는데,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6.4유로. 비싸다. 거기다 향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따뜻한 겨울을 위한 컬렉션. 바닐라 라떼향.> 바닐라 요거트 향이 나는 가방에, 이걸 뿌렸다가는 버스안의 멀미유발자가 될 것 같았다.


아. 내 동생같은 송화둥이가 페브리즈 챙겨가라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왜 말을 안들었을까. 눈물을 머금으며 페브리즈를 내려놓고, 성능을 확신할 수 없는 1.65유로짜리 테스코 섬유탈취제를 장바구니에 담고, 샌드위치를 산 후 새라와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역시 아일랜드 날씨.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치고, 봄이 끝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공원에서 덜덜 떨며 샌드위치를 다 먹은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그냥 들어가자.] 라디에이터가 고쳐져 따뜻한 내 방에서, 나는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새라가 구인 연락을 받았다는 것. [축하해! 무슨 일인데?] [그래픽 디자이너야. 숙소도 제공되고, 열심히 하면 정규직도 될 수 있대.] [와, 잘됐다. 전공도 살리면서 일하는 거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더블린이 아니라, 이상한 시골동네야. 70명 정도 사는 마을이래.] [음…. 그래도 주말에 더블린으로 올 수도 있잖아?] [사실 잘 모르겠어. 일단 5월부터 할 수 있다고 메일은 보내놨는데, 될지도 모르겠고, 되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시티 센터에서 있는게 더 재밌을 텐데.] [그래도, 전공도 살리고, 좋은 기회네! 축하해!] [내가 이 일을 한다면, 영어가 안 돼서 정규직은 못 될 거야.] [그래서 영어공부하려고 5월부터 할 수있냐고 한 거야?] [응. 플랫메이트 세명이 다 아이리쉬니깐, 영어 익숙해질 꺼 같아.] [너 영어 괜찮다니깐?] [아니야. 나 영어 못해.] [너 나랑 지금 계속 영어로 이야기하고 있잖아. 내가 너한테 말한 프랑스어 마카롱이랑 에비앙 그런거밖에 없었어.] [아니야. 나 영어 못 해. 프랑스 사람들 영어 발음 이상해.][아니야, 니 영어 문제없다니깐?]

이상하게도 이날의 대화 주제는 계속해서 ‘영어’였다.
사라와 이야기를 하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갔더니, 냉동야채와 치킨너겟 네조각을 먹으면서 이탈리아 여학생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영어를 못 해서 속상한지, 영어 학원의 아이리쉬 선생이 얼마나 말을 빨리 하는지, 학원에서 계속 지적당하는 자기들의 발음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영어로 이야기했고, 저녁을 먹고 나서 올라가자 새라 역시 계속해서 영어에 대해 영어로 고민을 늘어놓았다. 이탈리안 둘이나, 프렌치나, 토익 RC 마지막 파트에나 나올 것 같은 어려운 단어들을 잘만 쓰면서, 계속 영어를 못한다고 영어로 잘만 이야기했다.

그들이 자신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악센트였다.
자신의 악센트가 자신감의 근원일수도 있고, 자괴감의 근원일수도 있다.
하지만 피부색이나 국적으로 한 사람의 가치에 차등을 두는 행위가 옳지 않은 이 세상에서, 한 국가의 역사와, 언어의 흔적이 담겨있는 악센트로 자신이나 타인의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행위가 옳은 행위인지 그른 행위인지는 선뜻 판단할 수가 없었다. 분명 영어도 표준 발음이라는게 있는 법이고, 그건 어찌보면 엄연한 객관적 잣대니깐. 그리고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악센트가 있고, 듣기 싫은 악센트들이 있기에.

영어에 한없이 스트레스받는 새라에게는, 그저 옛 선인들의 말을 인용해줄 수 밖에 없었다. [영어 발음이 어떻건, 그냥 알아들으면 된 거야.] 우리 조상님들이 그러시지 않았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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