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대행사 AE에서 스타트업 PR매니저로
사실 난 매니저라는 직함을 달기에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겸손을 떠는 게 아니라, 인턴까지 끌어모아 만 2년도 안되는 경력으로 'manager' 수식어를 얻었으니 스타트업이라 가능했지 다른 곳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의 브런치는 PR Manager로서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무용담이나 조언을 담기보다는 주니어 피알매니저의 찌찔함과 치열한 배움의 현장, 가끔 있을 뿌듯함을 기록하는 정도가 되겠다. 나와 같은 처지의 스타트업 피알매니저들의 공감의 장이 되면 더 없이 좋고.
스타트업에 와보니 외부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바로
"여기 오기 전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그 다음엔, "왜 오셨어요?" 였다.
스타트업 종사자들 중엔 엄청난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명문대는 물론이고 (말로만 들어보던 아이비리그 포함)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다니던 사람들이 회사를 때려치고 나와 스타트업에 입성한다. 간혹 올라오는 그들의 인터뷰를 보거나 아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 팀장님만 봐도 (지금은 내 옆에서 초코 아이스크림을 드시며 눈누난나 하고 계셔서 약간 멋짐이 떨어지기는 한데) 대단한 직장을 그만두고 이 곳에 온 만큼 각오도 남다르다. 대표님의 비전에 깊이 공감하고, 우리 회사가 잘 될 것을 진심으로 믿으며, 정말 열정적이다.
그런데 난 사실 그런 열정의 아우라를 뿜으며 이 회사에 지원한 건 아니었다. 전 회사가 죽도록 그만두고 싶었고 사실 지금 회사에 이력서를 낼 때는 이미 사직서를 던지고 난 뒤였다. 대체 소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그래서 대화를 하다보면 시쳇말로 '암 걸릴 것 같은' 시츄에이션을 수십번을 겪고 난 뒤라 꽉 막힌 기업은 절대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로켓펀치를 두리번거리다 괜찮은 연봉을 주는 회사가 (돈은 나에게 중요한 조건이다) 1-2년 경력의 홍보 담당자를 뽑는다기에 지원했고 면접을 봤다. 그리고 난 지금 여기 있다.
전에 다니던 회사는 홍보대행사였다. IT회사들을 전문으로 대행하던 곳이었고, 나는 외국계 B2B 소프트웨어 기업 두 곳을 담당했다(사람들은 이 말만 들어도 "아.. 재미없으셨겠다"라고 말하더라). 여느 홍보대행사들이 그렇듯이 일은 항상 많았다.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 외에 행사도 있었고 새로운 어카운트를 따오기 위한 제안서 작업도 항상 있었다. IT도 재미없고 일의 양도 스트레스였지만 홍보전문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 여기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일요일 밤엔 불안함에 잠이 안와 수면제를 먹고, 오늘이 입사한지 세 달 하고 며칠인가를 매일매일 세아려 가면서, 2년이 되는 날은 또 얼마나 남았는가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그렇게 버텼다.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정적으로 내가 그 곳을 그만 둔 이유는 '소통의 방식'에 질려버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내 앞뒤로 1년씩, 그러니까 2년치의 신입이 다 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도 흔들리지 않던 내가, 먼저 나간 선배들이 "거긴 아니야. 얼른 나와"라고 했을 때도 2년을 고집하던 내가 한순간에 퇴사를 결심하게 된건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기업엔 발전이 없다'는걸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곳의 대표는 단 한번도 사원들과 진심으로 이야기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방법을 몰랐다. 들어온지 3일 된 신입이 일을 못한다는 이유로 인신공격을 일삼고 그 신입이 며칠 뒤 울며 퇴사하는건 일상다반사였다. 누구는 한 달에 몇 백을 벌어오는 애, 누구는 천이백을 벌어오는 애라고 마치 죄수 번호마냥 돈으로 우리를 부를 때도 사회는 원래 이런건가보다 했다. 내 소개로 우리회사에 3개월을 다니다 쫓겨난 내 친구는(미안하다) 다니는 내내 스트레스로 생리를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니다 보니, 그녀의 '소통무능력'이 회사를 망하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클라이막스는 올해 설에 있었던 연봉협상이었다. 홍보대행사는 관례적으로 매년 성과에 따라 연봉협상을 한다. 특히 내가 다니던 곳은 성과급이나 복지가 전무했기 때문에 전 직원이 협상만 바라보고 일년을 버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협상은 입사를 하고 내 성과를 입증할 수 있는 첫 기회였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그 깐깐하다는 대표가 그래도 나의 업무성과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고, 회사 모든 선배들이 'XX 이는 이번에 연봉 많이 오를거다'라고 말하곤 했으니 기대를 안 할래야 안 할수가 있나.
그러나 기대는 산산조각처럼 부서졌다. 그 해 회사는 일방적으로 연봉동결을 통보했다. 연봉동결보다 더 충격적인건 회사가 동결을 통보한 방식이었다. '당신이 연봉을 올려받아야 하는 이유'를 A4용지에 서술해서 내라고 했던 회사는 그 종이를 토대로 '회사가 연봉을 올려줄 수 없는 이유'를 이야기 했다(완전 역발상). 바로 며칠 전 나의 성과가 대단하다고 극찬했던 대표는 "네가 잘하긴 했는데 새로운 비즈니스를 따오지 못했다"며 내 일년의 성과를 폄하했다. 회사가 술렁였고 협상 한달 후, 대리급 7명이 퇴사했다. 사람이 다 나가고 나중에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대표는 경영지원팀을 통해 '연봉을 올려주고 성과급을 몰래 따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한 말은 딱 한마디였다.
그렇게 올려줄거였으면 진작 올려주셨어야죠.
한 달 뒤, 나는 회사를 나왔다.
내가 나온 뒤로도 시니어급이 계속해서 퇴사하고 있는 걸로 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화가 났던 지점은 '연봉을 못 올려준다는 사실'이 아니라 "네가 작년에 일을 못해서 돈을 못줘"라고 말한 회사의 태도였다. 만약 대표가 "회사가 어렵다. 하지만 작년에 정말 수고 많았고 고맙다. 일 년만 더 고생해달라"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진심어린 맘으로 우리와 이야기했다면 나는 여기 없었을까.
어떻게 생각해보니 고마운 일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눈물나게 행복하니깐.
왜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
P.S. 홍보대행사에서 고통받는 세상의 모든 어린 양이여, 축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