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운명을 사랑하라
내 손목에는 타투가 있다.
스물여덟 여름, 사춘기가 온 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 걷잡을 수 없었던 그 때. 무슨 짓을 해도 가슴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지 않아 문신을 하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어준 그 문구로.
Amor fati.
김연자 선생님의 신나는 곡으로 유명해진 말이다. 간혹 내 문신의 문구를 물어보고 "아모르파티요?(풉)재밌으시네요" 하며 날 그냥 '유쾌한 사람' 또는 '욜로족' 정도로 단정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아모르파티는 그리 가벼운 뜻은 아니다. 경쾌한 트로트 가사처럼 마음가는대로 즐기며 살라는 뜻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물론 나도 그 노래를 참 좋아한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파티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운명관을 말하는 용어로, '운명애', 'love of fate'라고도 불린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지식을 잠시 빌리자면,
니체에 따르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힘들더라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어려움 등에 굴복하거나 체념하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運命愛)’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어려움까지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방식의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즉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가치 전환하여,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모르파티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 들었던 '실존철학' 교양수업에서였다. 읽어야할 페이퍼가 너무 많고 써야하는 글도 그에 못지 않게 많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수업이었다. 그야말로 내가 '대학생'이라는 느낌을 줬달까.
그 수업이 나에게 남긴 것은 두가지. 니체가 말하는 '실존의 의미'와 아모르파티.
삶의 한 가운데 죽음을 가져와, '죽음'을 '사는 것' 만큼이나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 인간은 비로소 실존한다.
-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의 실존 철학 中
죽음을 삶만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나에게 어떤 운명이 닥쳐와도 그 운명을 사랑할 것.
이 문구가 지금까지의 내 삶을 지탱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고난은 있다. 어디에선가 '누구에게나 인생의 파도는 똑같은 횟수로 온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이미 많이 힘들었으면 나중의 파도는 잔잔하다고 했다.
인생을 많이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나만의 우주에서 나름대로 괴롭고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한가지는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큰 파도가 밀려와도 마음이 단단하면 휩쓸려가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파도여도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외적인 상황이 해결되고 나서도 여전히 흔들린다. 살랑이는 바람에도 다시 파도가 올까 무서워, 모든 삶의 순간이 죽음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 가끔씩 찾아오는 잔잔한 바다 위 내리쬐는 햇살의 순간조차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된다. 내가 그랬고 지금도 약간은 그렇다.
그럴 때마다 가만히 내 오른쪽 손목을 본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네 운명을 사랑하라. 가만히 되뇌이면서.
그러면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긴 이야기를 통해 내 손목의 타투를 만들어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이 문구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요즘에는 무엇을 새겼냐는 물음에 쉽게 답을 하지 않는다. 위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할 수는 없으니까. 할 필요도 없고.
대신 얼마전에 읽은 허지웅 작가의 책에서 본 내용을 적는다.
내게는 문신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른팔에 쓰인 글귀가 무슨 뜻인지 물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비밀이라고 말했다. (중략) 대단한 글귀라서가 아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남에게 권할 것이 아니라 입다물고 내가 혼자 조용히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의미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까먹지 않으려고 굳이 살 위에 써놓은 것인데 그 의미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낭비가 아니겠는가.
- <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