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쓰는 편지
만난지 정확히 7년이 되던 기념일 다음날, 그는 독일로 떠났다. 그리고 장거리 연애 6개월만에 나는 이별을 통보 받았다.
내가 너무 사랑했던 한 남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월요일 저녁에 전화를 받고 너무 정신 없이 일주일이 지나갔어. 사실 더 정신없이 살려고 노력했어. 저녁마다 친구들을 부르고 평일에 안하던 마사지도 예약하고 하면서.
누구에게나 이별은 당황스럽지만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었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당황스러웠던거 같아. 우리는 그 날까지도 농담을 했고 전날까지도 서로 먹은 것들의 사진을 보내고 그 전주까지도 10년 뒤를 이야기 했으니까.
아마도 자기는 모든걸 준비하면서 밖으로만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독일에 가기전에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을 했다고 하니까. 그럼 좀 말해주지 그랬어. 난 아직도 그게 서운하네. 자기는 아니었는데 나 혼자만 행복해하고 자꾸 미래를 바라봤던거 같아서.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편지를 쓰고 있는건 아니야. 월요일에는 나도 많이 흥분 상태였고, 그래서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말한게 많았어. 일주일동안 몇번이나 연락하고 싶었던걸 꾹 참고 차분하게 생각해봤어. 우리의 관계와 이 상황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내가 너무 자기 진짜 맘을 모르고 한국에 들어와야 한다는 압박감을 줬구나'였어. 나는 '외국에 살아보고는 싶지만 몇년 내에 한국에 들어오는게 목표다'라는 자기 말을 믿었어. 이 말이 날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었다는건 이별 후에 알았지만. 좀더 빨리 솔직히 말해주지 그랬어.
자기가 나에게 물어봐주길 바랬어. '나는 돌아가기 싫어. 니가 오는 것도 싫어. 부담스러워'가 아니라 '나는 여기 있고 싶어졌어. 너는 어떻게 할래?'라고.
우리의 7년 반의 관계를 끝내는데 있어서 내가 아무런 의견을 말하지 못한채 통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건 되게 슬픈 일이었어. 자기는 내 생각은 상관없이 이미 수년에 걸쳐서 벽을 쌓았고 결론을 내렸고 떠났어. 그걸 난 설득해보고 싶지만 결국엔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겠지. 절대 못한다고 했지만 해야만 한다는걸 알고 있어. 사실 이미 받아들이는 중이야.
'너는 어떻게 할래?'라는 질문을 하지 않은건 헤어짐의 이유가 꼭 상황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이겠지?아마도 자기가 말한 우리의 관계 때문일거야. 의무적인 관계에 의문을 가진지는 오래라고 했으니까. 단순히 상황 때문이었다면 그렇게 결론내리고 통보할 사람은 아닌데. 내가 간다고 해도 관계를 지속할 맘은 없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통보를 받았지만 우리의 관계에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봤어. 뭐, 이건 변명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야. 그냥 당신이 그동안 정리된 마음을 이야기했듯이 나도 정리된걸 전달하고는 싶어.
지난 7년동안 난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았어. 모든 면에서 자기는 배울게 많은 사람이었고 진심으로 존경했어. 편안했고 참 좋아했어. 다만 자기는 늘 바빴고 그래서 난 불만이 많았지만, 그 이유로 헤어질 생각은 없었을 정도로 좋아했기 때문에 자기의 패턴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아. 연인과의 더 잦은 만남과 여행 같은걸 기대하기보다 그냥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고 밥 한끼의 일상에 감사하고. 지금의 행복보다 나중에 우리가 결혼을 하고 여유를 찾으면 갖게 될 행복에 더 포커스를 맞췄던 것 같아. 아마도 현재의 행복함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살았던 것 같네. 대신 현재에서는 다른 것에 몰입하려고 노력했지. 그게 나한테는 일이었고. 그게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나 스스로를 다잡으면서 우리의 미래를 기다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어. 자기가 항상 그랬잖아. '나중에 내가 자리 잡아서 시간이 많아지면'이라고. 나도 모르게 자꾸 그 꿈을 꿨던거 같애. '그래 오빠가 시간도 여유도 많아지면 우리가 못해왔던 것들을 다 같이 하자고 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나도 커리어를 쌓고 돈도 모아놔야지'라고. 어쩌면 일에 미쳐 사는 지금의 나는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모습일지도 몰라.
근데 이 모든건 우리와 나 자신을 위하는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아. 내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첫 연애라 뭐든 서툴러서 그랬나봐. 나는 처음의 나처럼 계속 열정적이어야 했어. 보고싶은데 보지 못하는 그 상황에 순응해서는 안됐어. 지금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면서 미래만 기약하는 연애는 틀렸어. 헤어질 각오를 하고서라도 나의 불만족스러움을 말했어야 했어. 그걸 계속 속으로 삼키면서 훗날만 바라보는건 아니었어.
그래 우리는 끝났어. 복잡하게 꼬인 이 모든 상황들이 정리되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우리의 감정이 다시 뜨거워진다는건 기적에 가깝지.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거야. 현실은 동화책이 아니니까. 나는 인정하기로 했어. 나를 차버린 당신이 밉고 보고싶지만 이제 그만하기로 했어 나도.
다만 진심으로 당신이 잘되길 바래. 정말 간절하게 진심으로. 내가 7년 반동안 봐온 당신은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어. 이런 끈기와 성실함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었어. 내 평생을 의지해도 되겠다 싶었을 정도로. 당신의 목표가 사회적 물질적 성공이든 워라밸이 보장되는 안락한 삶이든, 그게 독일이든 외국 어디든, 꼭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을 누리게 됐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제 더이상 시간에, 일에, 돈에, 불확실한 미래와 징징대는 애인에 쫓기지 않고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되길 바래. 당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참 아꼈던 사람으로서,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지길 기도할게.
나도 이제 다른 행복을 찾아보려고. 당신과의 미래를 꿈꾸는 행복에서 이제 온전히 나에게 뿌리를 둔 행복을 찾아보려고 해. 나는 그게 일인줄 알았는데 자기랑 헤어지니까 일과 돈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 그냥 버팀목 같은 거였나봐. 그래서 이제 정말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만하게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원천을 찾아보려구.
그래도 우리 너무 좋았지? 당신이 있는 그곳은 내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데다 벌써 다른 사람도 생겼다니까 자기는 좀 쉬울지 모르겠다. 나는 어딜 가든 우리 함께했던 추억들 투성이라 좀 힘들어. 혼자서 어딜 가보려고 하는데 어디도 갈 수가 없네. 뭘 먹으려고 해도 동네에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좀 불리하다 그치.
오빠. 내 20대를 함께해줘서, 위로해줘서, 안아줘서, 너무 사랑해줘서 진짜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나는 외롭지 않았어. 나 나름대로는 당신에게 솔직하게 말 못한 힘든 일들이 있었지만 자기 덕분에 슬픔에 파묻히지 않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 수 있었어. 자기가 내 자부심이었거든. 남들 앞에 주눅들 때도 자기가 있다는거 만으로도 나는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었어요. 이제 스스로 서볼게. 나도 이제 서른살 어른이니까. 자기도 나와의 7년 반, 예쁘게 간직해줘. 나중에 죽기 전에 꼭 한번 당신 생각 할게요.
마지막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