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피디 Apr 15. 2018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의 20대는 아빠에 대한 분노, 그 자체였다.

지난 10년, 나라는 인격체의 성장 과정은 아빠와의 갈등 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아빠를 미워했고, 증오했고, 싸웠고, 때로는 연민했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서야 조금씩은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항상 엄마 편이었다


엄마 아빠는 잘 맞지 않았다. 저렇게 맞지 않는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맞지 않았다. 엄마는 천성이 예민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빠는 술을 좋아하는 그냥 전형적인 한국 남자. 엄마는 세심하고 자상한 남자를 만났어야 했고, 아빠는 같이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호탕한 여자를 만났어야 했다. 둘은 상극이었다. 


엄마는 소심한 편이어서 주도적으로 리드하는 아빠가 처음에는 믿음직스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에 제반되는 상황들 - 전형적인 한국 남자의 가부장적 마인드와 행동들 - 에도 참고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더 이상 참지 않게 되자 갈등은 분화구처럼 터져 나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빠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은 두 사람의 평행선 각도를 더욱 넓혀놨다. 


나는 항상 엄마에게 내 자신을 투영했다. 약간의 사춘기를 지난 열일곱 때부터 엄마와 나는 친했고, 아빠는 항상 멀었다. 사업을 한답시고 자식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이야기를 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듣는 얘기는 주로 엄마의 프레임을 거쳤다. 그래서 엄마가 아빠를 미워하게 되는 만큼 나도 아빠를 미워했다. 



내 20대는 아빠에 대한 분노, 그 자체였다


내가 공감능력이 뛰어난 여성인 탓으로 엄마의 분노는 고스란히 내 안에 저장됐다. 감수성 민감한 고등학생 내내 쌓여온 내 안의 분노는 성인이 되자 아빠에 대한 공격성으로 터져 나왔다. 본격적으로 나는 아빠와 싸우기 시작했다. 아빠가 엄마를 공격할 때마다 나는 미친개처럼 달려들었다. 내 안의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엄마의 넋두리는 거기에 끊임없이 불을 지폈다. 자식이 죽자고 달려들자 아빠의 분노도 배로 커졌다. 우리가 한바탕씩 폭발할 때마다 나도, 아빠도, 엄마도 힘들었다. 


가끔씩 내 남동생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내가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개처럼 싸우는 동안 남동생은 모든 상황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아빠에게 따질 때, 내 동생은 나지막이 욕을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평화를 찾으려 노력했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했어야 했다. 부부 사이의 일은 자식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에 대한 보호 본능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모른척 했어야 했다. 엄마에 대한 정신적 책임감 때문에 나의 20대는 내내 힘들었다. 



그의 인생이 조금은 불쌍해졌다


아빠와 나, 둘 다 나이가 들었다. 혈기왕성하던 아빠는 늙어갔고 마그마처럼 들끓던 나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순간순간 아빠 생각이 날 때가 많아졌다. 제법 성숙한 연애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엄마의 프레임이 아닌 내 주관을 가지고 둘의 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씩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다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는 또 한바탕 했다. 그러고는 다시 만나 술을 마셨다. 아빠는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미안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했다. 나도 아빠를 하나의 인생으로 연민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이런 말을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잘못한 게 많지. 그런데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억울해. 나도 그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했거든. 근데 결과만 보면 내가 잘못한 게 된단 말이야. 그래도 나는 억울할 겨를이 없었어. 내가 힘들게 한 사람들이 너무 억울해하니까. 내 인생을 억울해할 틈이 없었어.


아직 아빠를 백퍼센트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 대사에 있어서는, 진심으로 아빠의 편에 서서 그의 억울함을 이해했다. 모든 곁가지들을 다 쳐내고 오로지 이 대사와 이 감정 안에서. 아빠라는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그 억울함을. 


그렇게 아주 조금씩 아빠와 나는 회복 기간을 가지고 있다. 나의 30대에는 아빠와 어떤 모습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