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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피디 May 18. 2018

나는 저렇게 진심으로 웃을 수 있을까?

파리, 재즈바, 춤추는 할머니

누구에게나 인생의 '노잼시기'가 있다. 나는 주로 봄에 노잼시기가 찾아오는 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핑크빛 봄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는다. 딱히 일로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던 놀고 먹는 대학생 때도 봄은 우울의 시기였다.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다운되고 입맛이 사라지고 무기력이 온몸의 말초신경까지 차오를 때면 나는 매번 어찌할줄을 모르겠다. 겉모습은 착 가라앉아보여도 내 정신은 몸부림을 치고 있다.


작년 이맘 때는 홍콩에 갔었다. 당시에 쓴 브런치('이대로 살아도 행복하겠니?'라는 아주 오글거리지만 120% 솔직하게 썼던 글이 있다)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걸 보고 나 같은 무기력을 느끼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은가보다 생각했다. 좀 위로가 됐다. 인생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잔인한 5월, 올해는 파리에 오게 됐다. 여행이 아니라 출장이었다. 파리를 참 좋아하는 나지만 무기력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런던까지 다녀와야 하는 열흘 파리 출장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가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진심이었다. 난 파리에 갈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늘러붙은 치즈마냥 가라앉았던 내 기분은 일을 하면서 조금씩 풀어졌다. 이따금씩,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할 겨를도 없이, 딱딱한 돌멩이가 되어 푸우욱 다시 떨어질 때도 있었으나 일에 집중하면 다시금 괜찮아졌다. 그렇게 9일을 보내고 마지막날, 자유시간이 됐다.


사실 자유시간이 없었으면 했다. 사색에 잠길 시간이 생기면 또 기분이 가라앉을까 무서웠다. 그러면서도 '그리웠던 파리를 하루밖에 못보고 간다니!'라며 슬퍼했다. 파리에 처음 와봐서 모든게 신기한 후배의 가이드를 자처하고 일부러 바쁘게 움직였다. 무엇이든 몰입할 대상이 필요했다.



자기는 아무데나 다 좋다는 후배에게 어디가 가고 싶은지 묻고 또 묻다가 결국 내가 좋아했던 곳들 위주로 가기로 했다. 노틀담 성당 앞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한참동안 책 냄새를 맡다 고양이와 눈을 맞췄다. 하교한 아이들이 신나게 뛰노는 '보쥬 광장'에서는 겨우 두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모래놀이 하는 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봤다. 하염없이 걷다가 '생루이교'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기도 하고 젤라또도 먹었다.


언제 가도 힐링되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도도한 고양이가 살고 있다.
날씨가 너무도 좋았던 날, 센강을 따라 걷다가 발견한 그림
그의 연주는 너무 훌륭했다.
아름다운 보쥬광장의,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


하루가 다 갈 무렵, 후배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 했다. 마지막 밤을 여기서 보내야 한다나. 영화 라라랜드에 나왔다는 재즈바였다. 복잡한 생미셸 거리 한쪽에 계단을 타고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 동굴 같은 공간. 이 곳에 내 머리를 울리는 장면들이 있었다.


묵직한 색소폰 소리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연주되는 음악은 흥겨웠다. 엇박도 기막힌 예술로 만들던 드러머와 피아노 연주자가 모든 이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까만 장미로 한껏 멋을 낸, 영화에서 한번쯤 봤을법한 비주얼의 여자가 노래를 시작하자 하나둘 스테이지로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어떤 노부부가 있었다.


영상 캡쳐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게 아쉽지만.. 참으로 해사했던 그녀의 웃음


서로를 연신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두시간을 지치지도 않고 춤을 추던 그들. 하얗게 샌 머리를 곱게 따서 말아 올린 그녀는 그녀의 얼굴만큼이나 동그랗고 귀여운 안경을 쓰고는 해사하게 웃었다. 빠른 템포에 맞춰 턴을 돌 때마다 가녀리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녀의 몸을 감싼 잔꽃무늬의 민소매 플리츠 원피스가 아름답게 원을 그렸다. 그의 다리에 올라타기도 하고 그의 목에 매달리기도 하면서 빠른 템포에 몸을 맡겨 그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내가 놀란건 그녀의 춤 솜씨가 아니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는 것처럼' 시종일완 웃던 그녀의 얼굴. 그녀라고 왜 인생의 시름과 걱정이 없을까. 하지만 어제 그 재즈바에서 춤을 추던 그녀의 얼굴에는 티끌만큼의 슬픔도 불안도 우울도 없었다. 그녀는 몰입하고 있었다. 너무나 행복해보였다.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에 몰입하는 순간만큼은 백퍼센트 충만하게 웃을 수 있다는건 축복이자 엄청난 능력이다.


원피스가 핑그르르


그녀의 표정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고개를 돌리니 춤을 추는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러했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많은 노부부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춤을 췄다.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나와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나보다 훨씬 젊고 생기있는 얼굴로 눈짓을 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무슨 걱정이 있니 아가?
나도 안단다. 인생은 어려운 법이지.

하지만 여기는 파리고, 목요일 밤의 재즈바이고, 끝내주는 노래가 나오고 있어.

춤을 춰야지. 모든걸 잊고.


나는 언제쯤 저렇게 충만하게 웃을 수 있을까. 웃고 있는 나의 사진들이 저들처럼 진심으로 행복해보이지 않는다는걸 안다. 내면의 불안과 걱정이 내 얼굴에 드리워져 울고 있지 않아도 슬픈 분위기를 머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제 재즈바에서 조금은 마음 깊이 깨닫게 된 것 같다. 인생의 슬럼프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각종 자기계발서와 명언들이 말하는 불변의 진리를. 모든 인생의 조건들이 완벽해져야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건 아니구나. 결국 모든건 내 마음의 문제구나. 나도 웃어야겠구나. 저들처럼 최대한 거짓 없이.


그리고 다음에 이 재즈바에 다시 오면 나도 춤을 춰야겠다. 진짜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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