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무게

배낭 하나면 충분한데.

by 혜령

"공항에 가지 않는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보여 줄 게 없다. 세상의 경계에 서보지 않은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가져다 줄 게 없다."

어느 작가의 말을 옮겨 쓰며 다시 나침반을 찾은 듯하다. 잘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매번 여행에서 돌아오면 다시 떠나는 꿈을 꾸며 아침을 맞이했다. 도시를 정하고 그 도시의 사람들과 역사를 알아가는 일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의. 식. 주에 관한 일체의 사치가 의미 없게 느껴지고 떠나는 일과 느끼고 돌아오는 삶에 반했다. 여행을 다니며 점점 가방의 무게가 줄어들고 이제는 얼마나 홀가분한 짐 만으로 떠날 수 있을까 호시탐탐 기다리는 시간이 즐겁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이 무거운 짐이다.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걱정만큼이나 빼곡해진 준비물의 무게는 상당하다. 알고 보면 꼭 필요한 것은 배낭 하나면 충분하다. 최소한 작은 트렁크가 따라붙지만 늘 희망은 '배낭 하나'이다.

오월에 떠나기로 한 크로아티아 여행이 좌초될지도 모르는 지금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 출렁인다. 기회가 온다면 최소한의 짐을 챙겨 최대한 긴 시간의 여행길에 오르고 싶다. 이별하고 떠나는 것들과 이별하고 돌아오는 모든 것들을 가벼운 마음과 맑은 가슴으로 대할 수 있게. 그것이 생의 마지막 일정이라 하더라도.


처음엔,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사진과 흔적을 가지고 와야 할까. 놓칠 수 없는 욕심이 무거운 짐의 무게만큼 긴장하게 했다. 멋진 포즈와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내고 만들어 오는 것이 보람 있는 여행인 줄 알았다. 선글라스와 모자 그리고 변신을 위한 옷과 구두를 열심히 챙긴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비슷한 사진과 사람들 사이에서 진짜 의미를 잃어버린 시간들이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여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의 여정에는 편한 모자와 선글라스, 최소한의 옷과 더위와 추위를 막는 정도의 여분만 가지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더 많이 보고 더 쉽게 움직였으며 걸어 다니는 일정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시간은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현명해지라고 지혜를 가지라고 시간은 내 곁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이제는 내일 당장 떠난다고 해도 준비는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꼭 필요한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그곳에 머무를 때이다. 모두가 몰려서 사진을 남기려는 장소가 아니어도 천천히 걷다 보면, 생각지 않은 사소한 장면이 보석처럼 빛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체르마트의 어느 저녁에 해가 지는 마터호른을 등지고 우유를 사러 나가면 일제히 몰려드는 차갑고 맑은 바람이 들풀과 나를 흔들어 주었다. 산행을 마친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추억들이 거리의 카페와 클럽에 꽃처럼 걸리고 노란등이 별이 된 길가엔 내가 걸어간다.

무엇을 입고 얼마나 예쁘게 치장을 했는지가 아니라 그 속에 녹아서 풍경이 되어 버린 내가 미치도록 아름답고 행복했었다.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자랑하며 보여 줄 수도 없는 순간이었지만 그것 만으로 충분히 보상받은 추억이 되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여행이었고 삶이었으며 선물이었다.

진짜 여행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보여 줄 수도 없고 표현하기도 어려우며 그냥 영혼에 새겨지는 것. 그것도 그때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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