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도 담을 수 없을 만큼 느슨해지는 시간과 장소를 향한다.
기억의 대치.
교환이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며 걷기를 멈추지 못한다. 슬픔이나 아픔이 잘 썩지도 않는 것에 힘들어하며 계절만 기다린다.
잠이 들면 깨어나고 눈을 뜨면 마주하는 그것들을 안고 버티는 일이 고되고 무기력해졌다.
대치될 수 있는 무엇이 부족한 이유인지 오랜 시간 분리되지 못한 살과 가죽처럼 어두운 냄새로 삶이 익사할 지경이다.
어디론가 향한다고 인간의 악취가 사라질 리 없다.
문득 기억 안에서 낯설지 않은 바다와 바람과 바위가 길을 인도한다.
거칠고 마른땅의 먼지가 온몸에 달라붙는 저녁이 오면 따뜻한 마을 입구의 노란 등이 맞이하는 시간으로 스며든다.
뜨거운 우유 한 잔과 계란과 치즈를 올린 빵조각이면 된다.
동네 입구의 작은 야채가게에서 산 서양배와 오렌지가 있다면 더욱 감사하다.
잃어버리고 때로는 빼앗기는 것들이 있다 하여도 아직은 고맙고 다행한 일들이 하루하루를 쌓고 있다.
더 엉성해야 하리라.
태양만이 찬란하다면 무지개를 만나기는 어려우니. 메마른 길을 오르고 나면 태양을 마주하고,
굽은 길을 돌아 한 바탕 소나기를 맞고, 천년쯤 기울어진 지붕 끝에서 만나는 무지개를 기대하며 떠나야 하리.